농사의 즐거움과 괴로움
금년 여름은 너무 무더운 날씨에 많이도 시달렸다. 내일이 백로인데 아직도 늙은 여름이 힘을 쓰고 있다. 옥상에 태양광 발전 시설을 해서 전기료 걱정 없이 에어컨에 매달려 살았다. 한데 이 에어컨이 실내는 시원하게 해주는데 실외기에선 가뜩이나 번철처럼 달구어진 한낮에 사정없이 더운 바람을 토해낸다. 도로를 꽉 메운 자동차나 시멘트 숲에 다닥다닥 달린 이것이 온도를 올리는데 한몫하는 건 아닌지.
참기 힘든 날씨는 사람만 괴로운 게 아니다. 밭에 가보면 뜨거운 햇볕에 곡식들이 거의 반죽음 상태로 늘어져 있다. 삶아놓은 것처럼 시들어 늘어진 곡식들이 아침 일찍 가보면 겨우 살아났다가 한낮엔 다시 그 상태가 된다. 이런 상황이 매일 반복되니 농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올해 고추 농사로 노심초사했다. 자식들까지 네 집 수요를 맞추려면 건고추 6, 70근은 해야 하는데 밭에 갈 때마다 걱정이 됐다. 고추가 익어 수확을 해보니 유례없는 뜨거운 햇볕 때문인지 색상이나 모양이 모두 정상이 아니다. 밭 밑에 흐르는 농업용 수로에서 물을 퍼 올려 고추나무는 잘 키웠는데 정작 익은 고추는 너무 볼품이 없다.
과육이 얇고 색상이나 모양이 좋지 않으니 상품(上品)에선 한참 모자란다. 판매하는 것이 아니고 자가소비용으로 지은 것이니 그냥 먹으면 그만이지만 판매용으로 대량으로 지었다면 고추 농사 망할 뻔했다. 올해는 소비자들도 품질 좋은 고추 대하기가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우리는 그래도 근근 마른 고추 60근 정도 건졌으니 감사해야겠다.
정상이라면 지금쯤 고추나무에 풋고추가 다닥다닥 붙어있어야 하지만 네 물(번) 따고 나니 빈 대만 남아서 조금 남기고 아예 뽑아버렸다. 올해는 풋고추 말림이나 풋풋한 삭힌 고추로 담은 동치미도 귀하게 생겼다.
농사는 가을 수확을 생각하면 보람되고 즐겁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진 참으로 험난한 과정이 농부를 괴롭힌다. 열심히 일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올같이 기후가 돕지를 않거나 병충해가 심해서 망치기도 하고 새 떼나 고라니 등 동물과도 싸움을 벌여야 한다.
세상일이 쉽게만 되다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농사를 지어보면 매해가 다르다. 올해엔 콩이 풍작을 이뤘다면 내년에도 똑같이 풍작이 되는 게 아니다. 경험으로 얻은 이야기가 참깨와 고추는 비가 너무 많으면 잘되지 않고 콩은 빗물이 많아야 잘 된다고 한다. 작물마다 맞는 기후조건이 있다. 발전한 농업 기술도 일기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농사가 온도에만 영향을 받는 게 아니다. 병충해도 매년 다르다. 비가 잦으면 탄저병 등 병이 심하고 가물면 진딧물 같은 해충이 많이 발생한다. 전에 없던 해충이 보이기도 한다. 위에서 얘기한 바대로 유해조수(有害鳥獸)와도 전쟁을 벌여야 한다. 열심히 심고 가꾸어 놓은 옥수수밭을 가치나 꿩 족제비 등이 쑥대밭을 만들고 고구마 잎을 고라니가 다 뜯어 먹을 땐 기가 막힌다. 이런 걸 잘 극복해야 가을걷이에서 웃을 수 있다.
농사에 힘든 것만 이야기했는데 반대로 즐거움 또한 크다. 농사는 소중한 생명을 다루고 키우는 작업이다. 일이 없어도 매일 밭에 나가 작물과 대화를 하고 교감을 한다. 내가 심은 작물이 잘 자라는 걸 보면 자식들이 잘 크는 걸 보는 것처럼 즐겁다. 가지가 하나 꺾여도 잎이 하나 떨어져도 농부는 속이 상한다. 농부의 마음은 누구나 같다. 자식 키우는 마음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다. 노후에는 힘이 들 때도 있지만 내 수준에 맞게 적당한 밭뙈기 하나 농사를 짓는다면 건강에도 좋다.
무엇보다 지은 농산물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줄 때면 너무 좋다. 부모가 지은 것이니 받아 가는 자식들도 특별하다고 여길 것 같다. 밥상 위에 아버지 어머니가 지은 농산물을 올릴 때마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것 아닌가. 내가 정성 들여 가꾼 걸 손자들이 맛있게 먹을 걸 상상만 해도 즐겁다. 이런 게 노후의 보람이 아닌가 한다.
모든 게 다 양면성이 있다. 농사도 장애물이 많아 힘들지만 즐거움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 기후가 맞춰주지 않고 각종 장애물로 고통을 받을 때 너무 속상하고 힘들지만, 가을에 거두어들일 때의 큰 기쁨은 농부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주말농장 같은 것도 있는데 좋은 것이다. 누구나 경작지를 가질 수 없으니 이런 주말농장 같은 것이 이런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하지 않고 있다면 해보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생명을 키우는 일도 가르칠 수 있고 농사의 고마움도 느끼게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