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화유산 발굴은 정체성 찾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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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문화유산 발굴은 정체성 찾는 것”
  • 도복희기자
  • 승인 2020.05.0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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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융조 이사장
옥천 안터마을 고인돌과 선돌의 의미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융조 이사장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융조 이사장

 

역사는 인간의 뿌리다. 묻힌 역사를 드러내는 일은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근간을 발견하는 것. 몇 만년 전 조상이 그곳에 남겨 놓은 것은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문화유산이다. 전통을 이해하고 역사를 알아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의 역사를 규명하는 일은 중요한 의미이다. 지역의 역사가 탄탄해져야 지역의 공동체 의식 또한 견고해져 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역사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선사문화 발굴과 지속적인 학술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동이면 석탄1리 안터마을에는 오천년 전 유적인 고인돌과 선돌이 보존되어 있다. 1977년 충북대 박물관팀이 안터마을에서 발굴한 고인돌 3기와 선돌 8기는 짝지어 동시에 세워진 것으로 옥천 역사 기원을 신석기시대로 소급하며, 죽음의 문화를 밝히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융조(79) 이사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에 대한 의미를 재조명함으로써 역사 기원을 규명하는 움직임이 시작되길 바란다.
 
△안터 1호 고인돌(충북유형문화재 제10호)
동이면 석탄리 안터마을에 있는 고인돌은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1977년 대청댐 수몰지역 문화유적 발굴조사의 일환으로 발굴했다. 이곳에는 각기 다른 형식의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을 비롯해 바둑판(남방식) 고인돌·구덩이(개석식)가 지형의 높낮이에 따라 있었다. 옆에는 많은 선돌이 떼를 이루고 있어 이곳이 큰돌(巨石)문화의 중요한 곳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발굴조사가 된 고인돌은 탁자식 고인돌(1호)이고 선돌과 짝을 이루어 있는 디소릿드형식이다. 무덤방의 크기는 75×145cm이다. 일상생활에 많이 쓰이는 유물은 무덤방의 유구 안에서 의식용은 유구 밖에서 출토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사람들은 무덤방을 생전의 생활공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겼을 것으로 추측한다. 출토된 유물은 가락바퀴· 지킴돌· 눈돌· 그물추· 빗살무늬토기의 입술부분· 모양새긴 돌과 얼굴돌 등이 나왔다. 무덤방안의 맨바닥에서 출토된 얼굴돌은 자갈돌(천매암)결면의 반대로 새김 수법으로 표시하고, 쪼으기 방법으로 약간 벌린 입을 표시했다. 얼굴돌은 눈을 가늘게 하고 껴묻거리가 모두 일상생활용품인 것으로 보아 이곳에 묻힌 사람은 여자인 것으로 해석된다. 빗살무늬토기는 입술 부분에 금이 있고 무늬는 긋기 방법으로 만들어 신석기 후기의 형식으로 해석되는데 안터 고인돌의 축조시기를 밝히는데 중요하다. 무덤방 유구 안에서는 노랑 흙(이것은 선돌 바닥의 흙과 같다)을, 유구의 둘레에는 붉은 흙을 5곳에 덩어리 채로 뿌려 놓았다. 이것은 묻힌 사람을 악귀로부터 보호하자는 뜻으로 보인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호(1975. 8.20)로 지정된 이 고인돌은 옥천과 충북지역을 대표하는 북방식 고인돌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5천년 전 신석기시대 여성이 묻힌 것으로 밝혀졌다.
 
안터 1호 선돌(충북유형문화재 제156호)
안터 1호 선돌(충북유형문화재 제156호)

 

△안터 1호 선돌(충북유형문화재 제156호)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굴된 선돌 유적으로 신석기 시대 문화 특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다. 안터 1호 선돌은 안터 1호 고인돌과는 일직선상 방향으로 210m 떨어져 있었다. 가운데 커다란 반원이 중앙에 쪼으기 방법으로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선돌의 윗부분에 떼인면을 만든 것은 의인화한 선돌의 모습에서 얼굴에 해당한다. 실제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도 이 선돌을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으며 제사의 대상으로 삼고있는 것은 이러한 전통적 사고에서 형성된 관습으로 보인다. 선돌의 가운데 새겨진 원의 둘레 86cm는 1cm마다 한번씩 86번 쪼았다. 왼쪽 아래에 있는 원의 호(弧)에는 좀 더 많이 하여 1cm에 2번 정도의 떼기를 해, 350번 정도 손질한 것으로 보인다. 이 원은 당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접하고 만물을 생성하는 원동력을 만드는 해일 것으로 해석한다. 태양을 상징하는 원을 배 부분에 표시하고, 볼록한 표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임신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안터 1호 고인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얼굴은 여자를 표현한 것으로 보여 고인돌에 묻힌 사람은 임신과 연결된 죽음이었을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안터 1호 고인돌과 선돌은 임신한 아내를 잃은 남편의 슬픔이 그대로 드러난 애틋한 사연을 담고 있다.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융조 이사장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선사문화유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융조 이사장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선사문화유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융조 이사장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5년부터 1976년까지 연세대학교 박물관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1976년 2007년 충북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30년 간 교수로 재직했다. 재단법인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을 열고 현재는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충북대학교 박물관장, 한국고대학회, 한국대학박물관학회, 한국구석기학회 아시아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명예회장으로 있다.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며 구석기학, 박물관학, 고고미술학 분야에 업적을 세웠다. 고고학자로서 51개 중요한 유적을 조사· 발굴· 연구를 통해 선사문화 복원에 힘썼다. 조사 유적 6곳에 박물관을 건립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교육하며 연구 기반 확충에 주력해 왔다. 구석기학 및 박물관학 분야에 10권의 저서와 39권의 편저서 2권의 번역서, 39권의 발굴 조사 연구보고서, 429편의 연구 논문을 낸 바 있다. 특히 단양 수양개 유적은 충주댐으로 수몰되었던 유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 결과를 지속적으로 발표해 국가 사적(제398호)으로 지정 받았다. 이를 세계 구석기 학자들과 교류하는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란 국제학술대회를 1996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개최하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러시아와 중국에서 각기 명예고고학박사와 명예이학박사를 받고, 문화재청으로부터 옥관문화훈장을 받는다.

1977년 12월 2일에서 13일까지 발굴 당시 충북대학교 박물관팀 발굴책임자로 있었던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융조 이사장은 “임신한 여인을 나타내는 선돌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으로 옥천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볼 수 있다”며 “고인돌과 선돌의 학문적· 문화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축제와 학술행사가 이뤄져야 하며 옥천에 분포되어 있는 또 다른 선돌에 대해서도 발굴 조사가 속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어 “옥천 군민과 이 지역 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발전적인 계획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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