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검도의 개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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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검도의 개척자
  • 오현구기자
  • 승인 2021.04.15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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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신 선생
충청북도에서 검도를 개척한 이교신 선생
충청북도에서 검도를 개척한 이교신 선생

 

이교신 선생은 동이면 평산리에서 태어나 충청북도에 검도를 전파하고 발전시켰지만 정작 우리 고장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선생은 어린 시절 일본서 사는 형님의 집에서 생활했다.

1934년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과 1937년 시모노세키 체육협회에서 실시한 검도 강습회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교육증서를 받았다.

이어 1941년에는 일본에 있는 시립 시모노세키 상공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재학 중 검도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시모노세키 상공학교 총 동문회장인 ‘우에다 츠요시’로부터 상장과 상패를 받았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이 고교 동문회장 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선생의 검도 실력이 출중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선생은 일본 생활 후 한국으로 돌아와 1955년 4월 19일 대통령으로부터 충청북도 지도사범으로 임명되었다.

이것이 충북지역에 본격적으로 검도를 전파하여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선생은 충북 경찰국 경무과 소속으로 사무관급 대우를 받으며 청주경찰서 상무관에서 경찰관과 학생들에게 검도를 지도했다.

우리 고장 출신이 충북 검도를 개척한 것.

그렇다면 사실상 옥천이 충북 검도의 뿌리이자 성지인 셈이다.

오세억 전 충북검도회장은 선생에 대해 “외모는 말쑥했으며 청주에서 지프를 몰고 다녔다. 법학 서적을 가방에 챙겨 다니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사법고시 시험을 준비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 지도사범 제도가 없어지면서 생활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고향인 옥천으로 내려왔다.

선생이 옥천에 생활할 때 충청남도 검도 사범들이 지도를 요청하여 대전 상무관으로 검도를 지도 하러 다닐 당시의 일화다.

대전역에서 불량배들이 돈을 빼앗는 것을 여러 차례 본 선생이 참다못해 호통을 치자 불량배 4명이 “너는 뭐냐”며 대들었다고 한다.

이 선생이 손부채를 내려치고 올려 치며 발을 걸어 넘어트리자 불량배들이 잘못했다고 빌어 타일러 보냈다는 것이다.

오 전 충북검도회장의 말에 따르면 손부채는 경무대에서 개최된 대통령 친람(親覽) 검도 대회 우승 당시 받은 상인데 손부채 양옆은 쇠여서 맞으면 치명상을 입는다고 한다.

고규철 검도 8단도 2006년 검도회보 가을호 ‘검도 단상’이라는 글에서 “선생은 연습 때 한 번도 맞아주지 않고 때리기만 하는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글로 보면 선생은 자상하지 않고 엄격한 지도사범이었다.

옥천군에서는 선생이 한국검도와 충북 검도의 선구자적인 인물로 밝혀지면서 각종 언론과 지역에 회자하자 2017년 가을에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 성주 이씨 선영에 있는 선생의 묘지 앞 도로에 알림 표지판을 세웠다.

이어 2018년에는 옥천군수가 이 선생 묘지 옆에 공덕비를 건립하여 선생의 검도에 대한 열정과 업적을 기리고 있다.

공덕비에는 ‘충북 검도회 오세억, 전 회장을 비롯해 중추적 인물들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김국환 부회장을 비롯한 후배 검도인들이 거둔 전국체전 4년 연속 종합 우승의 혁혁한 성과는 선생의 가르침’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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