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신 소설가 ‘육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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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신 소설가 ‘육정수’
  • 오현구기자
  • 승인 2021.04.2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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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정수 선생
제8회 청년학관 졸업식 (앞줄 가운데가 육정수 선생)
제8회 청년학관 졸업식 (앞줄 가운데가 육정수 선생)

 

육정수는 개화기 옥천이 배출한 신 소설가다. 선생의 아호는 삼전(三田)이며 본관은 옥천이다. 1885년 2월 25일 충북 옥천에서 명문가족인 육씨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육영수 여사 사촌오빠인 그는 12세인 1896년 서울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마침 독립협회가 창설돼 학당 안에서 서재필, 윤치호 등으로부터 신문학과 의회 헌법, 만국공법, 영어 등을 배웠다. 당시 이승만, 신흥우, 여운형, 정교, 양홍묵, 오긍선 등이 동창생들인데 그들과 함께 교내에서 협성회를 조직 창설회원으로 활약했다.

선생이 1908년 YMCA에 재직할 당시 24세의 나이로 집필한『송뢰금(松籟琴)』은 1903년에 개시된 하와이 노동 이민 배경과 요인, 실태를 집약해 보여주는 유일한 신소설이다.

육정수는 데슐러의 동서개발회사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 바로 이 점이 특별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 『송뢰금』의 집필을 가능케 했다.

육정수 선생의 『송뢰금』은 구한말 하와이로 이주한 조선인을 중심으로 해외 이민의 문제를 지적하는 최초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당시 서울에서 큰 주목을 받으며 개화기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는데 그 작품의 소재와 구성이 매우 파격적이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을 주된 배경으로 설정한 『송뢰금』은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됐다.

하나는 이민 과정에서 이산가족이 되는 김 주사네 이야기며 또 다른 하나는 근암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업 이야기이다. 그런데 소설의 후속편이 출간되지 않아 별개의 두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되어 하나로 합쳐지는지는 알 수 없다.

김 주사 가족 중심의 소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본 유학 출신의 김 주사(김경식)는 갑오경장 이후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주사가 됐으나 며칠 만에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평양으로 낙향했다.

김 주사는 평양이 청일전쟁의 전쟁터가 되자 다시 원산으로 옮겨 상업 경영을 도모했으나 러일전쟁으로 여의치 않게 되자 결국 가족과 이별하여 홀로 노동자로 하와이 이민 길에 올랐다.

김 주사는 일 년 만에 부인에게 가족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들어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부인은 계옥과 한봉 남매를 데리고 하와이로 향했다.

일본 고베에 도착한 계옥은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가족과 떨어지게 된다.

그 후 한인의 이민 업무 자체가 중단돼 계옥의 하와이행은 끝내 좌절된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송뢰금』은 미완의 소설이기는 하되 러일전쟁이 국내에 미친 영향, 사기 행각에 가까운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 문제, 토착 자본의 형성 가능성과 한계 등을 그려내고 있어 대단히 주목할 만한 소설이다.

특히 조선이 사라지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될 때 서민들 모습을 잘 묘사했다.

『송뢰금』신소설 관련 최초 연구자인 최원식 교수는 1984년 논문집에서 『송뢰금』을 애국·계몽기 대표적 신소설의 하나로 규정하고 하와이 노동 이민에 대한 실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이 소설은 하권을 출간하지 않은 채 상권만으로 끝났다.

그 이유는 『송뢰금』 상편을 출간한 이듬해인 1909년 2월 총독부는 출판법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꿔 서적 출판에 대한 통제를 훨씬 엄격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참맛』을 발표하고 3·1운동 때인 1919년 34세 되든 해 『옥리혼』을 발표했다.

특히 그가 남긴 작품들은 구한말 계몽기 문학사를 풍성하게 채워줄 문제작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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