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풍운아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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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풍운아 ‘김옥균’
  • 오현구기자
  • 승인 2021.05.1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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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풍운아 김옥균
시대의 풍운아 김옥균

 

갑신정변으로 유명한 시대의 풍운아 ‘김옥균’.

출생지는 ‘공주시 정안면’, ‘대전시 이사동’, ‘옥천군 안내면 인포리’ 등의 이견이 있으나 김옥균의 출생지는 ‘충북 옥천군 안내면’이라는 간과하지 못할 자료가 있다.

김옥균의 갑신정변 동지였던 옥천사람 정납이 쓴 「옥주유고(沃州遺稿)」다. 정납은 이 책의 발문에서 ‘김옥균은 옥천 출신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정납은 이 책에서 ‘화근이 미칠 것을 우려해 멀리 함경도 지방으로 피신여행을 했다’고 기록했다. 이어 ‘김옥균이 옥천에서 태어났고 김옥균의 처 유씨가 옥천 관노로 있을 때 친척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1894년 3월 7일 ‘시사신보’에서도 김옥균의 처 유씨의 “옥천에는 저희 조상의 묘소가 있고 문중 친척들이 살고 있어 잠시 의탁할 요량으로 찾아간 것입니다”라는 증언이 있다.

김옥균은 1851년 옥천군 안내면 인포리 걸포에서 안동 김씨 김병태와 송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6살 때 7촌인 김병기 부사에게 양자로 입양돼 서울 종로에서 자랐다. 김옥균의 5대 조상인 김시윤 청산 현감의 묘소는 장계관광지 강 건너 달돋이 산에 있다.

김옥균은 22살 된 해인 1872년 알성문과에서 장원급제해 1874년 교리와 정언 벼슬을 거쳤다. 이때 그는 개화 통상론자이며 정계의 거물이었던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오경석, 유대치에게 개화사상을 배웠다. 이 무렵 집권층이 문호개방을 추진하기 시작하자 개화파는 주목을 받으면서 개화운동을 추진했다.

김옥균은 도로 개수, 우정국 설치, 회사 설립, 공장건설 등 중상주의를 주장했고 특히 영국의 입헌군주제처럼 조선도 체제 변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정책을 통해 청나라에서 벗어나 부국강병과 자주독립 국가건설을 주장하는 급진개화파의 주도세력이 됐고 외교부 차관보급인 교섭통상사무, 동남개척사 겸 포경사, 호조참의에 올랐다.

김옥균을 이용대상으로 본 일본

1884년 12월 4일 김옥균은 우정국 준공식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다.

김옥균의 처 유씨 부인은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어린 딸을 데리고 시아버지의 고향인 옥천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구읍에서 주막 일을 하다가 주변의 밀고로 옥천 감옥에 갇혀 여자 노비로 전락했다. 그 후 몇 년 살다 나와 옥천 구읍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

천안에 살던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에게도 역적의 아버지라는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려져 천안 감옥에 갇혔다가 교수형을 당했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도 조선의 정치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일본 정부는 김옥균의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1886년 8월 태평양에 있는 외딴 섬인 오가사와라 섬으로 강제 추방한 것.

일본에 실망한 김옥균은 1894년 3월 청나라 북양대신 리홍장을 만나 동양평화를 위해 담판할 생각으로 중국 상하이에 갔다가 암살당한다. 청일전쟁 후 1895년 개화파 정권 때 복권돼 후에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됐다.

김옥균이 암살당한 해인 1894년 5월,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은 김옥균의 처와 딸에 대해 배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894년 6월, 일본은 한반도의 장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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