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때 장렬히 순국한 이득남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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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장렬히 순국한 이득남 의병장
  • 강형일기자
  • 승인 2021.06.2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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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군자감 주부공 휘 득남 할아버지 영정
17세 군자감 주부공 휘 득남 할아버지 영정

군자감주부 득남공(軍資監主簿 得男公), 李得男 (1599~1637)의 관적은 전의 이씨이고 자는 자술(子述)이다.

웃대(代)는 고려 초 덕장으로 고려 삼중대광태사전산후(三重大匡太師全山候)이고 이름은 도(棹)며 시호(諡號)는 성절공(聖節公)이다. 아버지는 어모장군 증 중추부사부총관 지영(枝英)이요 그의 자는 덕방(德芳)이다.

이지영은 선조 14년에 태어나 효종 6년에 75세로 운명했다. 아버지 지영이 영산 김씨 덕난의 딸과 결혼하여 5남 3녀를 낳으니 큰아들이 바로 득남이다.

조선시대인 1636년 청나라가 침략해 일어난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참전해 장렬하게 순국한 이득남 의병장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득남 의병장은 조선 인조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전국에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띄우자 우리 고장 일대의 의병들을 모아 충청병사 이의배와 함께 지금의 경기도 광주 험천진 전투에 나섰다가 전사했다. 병자호란 당시 최고 격전지로 꼽혔다는 험천진 전투는 임금을 보호하기 위한 전투였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고 결국은 청나라에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면서 임금이 항복하게 된다.

이득남 의병장과 함께 이원면 지탄리 출신인 박동룡 공도 무과에 급제해 조정의 부름을 기다리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험천진 전투에 참전, 전사했다. 조정에서는 이원면 포동리에 박동룡 충신문을 세웠다.

이밖에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했거나 전쟁에 참전한 우리 고장 출신 인물로는 전식, 주몽렬, 송시열, 조귀호, 박진립, 박정엄, 오종성, 여위로 공이 있고 박문강도 병자호란 때 전사한 충신이다.

2005년 전의 이씨 종중에서는 의병장 이득남이 순국한 지 370년을 기념하여 공의 후손들이 힘을 합하여 쓸쓸하고 황량하게만 느껴졌던 묘역에 송덕비를 수립하였다. 고증하여 간결한 행적을 아래와 같이 새겨 놓았다.

“의고충국(義高忠國)한 사람이 관(官)에 쓰이면 국사에 복리(福利)를 거두고 사악사리(邪惡私利)에 음흉(陰凶)한 분 득세(得世)하니 화(禍)가 천하에 미쳐 위해롭네. 떳떳이 몸 바치니 이치에 타당하고 충신이 죽었으니 관민이 통곡하며 묘 머리 비석 세워 충혼(忠魂)을 빌고 유구(悠久)히 잊을 수 없어 의고(義高)하고나.

서대산과 장령산이 크고 높다 한들 충장원훈(忠將元勳)한 굉홍(宏弘)에는 불급(不及)하고 금강물 해 맑아 끝없이 흘러간들 충의장절(忠義仗節)엔 차지 않는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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