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걸 풍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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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 풍태후
  • 김병학 편집국장, 언론학박사
  • 승인 2021.11.0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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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걸까, 또, 그러한 역사를 만드는 당사자는 누구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남녀의 구별은 오래 전에 무너졌다. 어쩌면 허우대만 멀쩡한 남자보다 비록 몸집은 작아도 자신의 주장이 분명하고 남자 못지 않은 능력과 공정심을 지닌 여자가 더 대우받는 세상이다. 

때는 서기 432년, 중국 북연(北燕) 왕 풍홍의 아들들이 북위(北魏)의 제3대 황제인 태무제에게 나라를 통째로 바치고 투항했다. 이로써 북위는 중국 역사상 가장 극심한 혼란기였던 ‘5호 16국’ 시대를 마감하고 화북 일대를 평정한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 무렵 훗날 북위의 새로운 역사를 쓸 ‘풍태후’가 태어났다. 풍태후는 비록 세상과 동떨어진 궁궐 안에서 살았지만 이 세계 또한 녹록치 않은 물고 물리는 보이지 않는 혈투의 장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풍태후’는 권력자들의 온갖 비리와 권모술수를 궁궐 안에서 보며 자랐다.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도 체득했다.

452년, 문성제가 태무제의 뒤를 이어 북위의 제4대 황제로 즉위했다. 이때 풍태후는 열다섯 살. 문성제는 무척이나 총명하고 영민한 군주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오랜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진 태무제 시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경제를 살리는데 주력했다. 

문성제는 풍태후보다 한 살 위였지만 서로가 통하는게 많았다. 문성제의 아버지는 태자 시절 모종의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사형을 당했다. 풍태후는 그 설움과 공포가 얼마나 크고 고통스러운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문성제를 풍태후는 여성의 부드럽고 섬세한 손길로 감싸 주었다. 그리고 그간 귀인의 신분에서 황후의 반열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후인 465년, 문성제가 갑자기 병이 들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당시 국왕이 사망하면 생전에 입던 옷과 물품들을 태워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풍황후는 이때 문성제가 사용하던 물품들이 불에 태워지는 것을 보고 자신도 불에 뛰어 들어 죽어버리려고 했다. 그만큼 문성제를 사랑했던 것.

문성제가 세상을 뜨자 열두살의 황태자 척발홍이 헌문제로 즉위하고 황후 풍씨는 그녀의 나이 스물 네살에 황태후가 되었다. 할머니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등장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북위 정권의 실세로 활동하던 을불 부족 출신 망명 정객 ‘을혼’. 

을혼은 괴팍하고 권력욕이 강한 사람으로 어린 헌문제와 황태후가 조정의 정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쉼없는 음모를 꾸몄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참히 목숨을 베버리고 아첨하는 자들은 수족으로 삼아 조정의 핵심요직에 앉혔다. 말 글대로 세상은 을혼의 독무대였으며 어느 누구도 그에게 대적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황태후가 을혼에게 말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이고 황제는 아직 어려 세상물정을 깨우치지 못했오. 경은 부디 우리 황실과 조정을 위해 힘써 주시오”라고.

비록 을혼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지만 황태후는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무리 큰 일이 일어나도 마음을 내보이지 않았으며 분명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라는 나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마침내 을혼이 반란군을 앞세우고 황궁으로 쳐들어 오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황태후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척발리를 진압군 대장으로 임명하고 만반의 준비를 명령했다. 이러한 굳은 의지를 본 백성들은 지지의 함성을 드높였다. 결국 그토록 날뛰던 을혼도 황태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나라의 혼란이 잡히자 황태후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기 시작했다. 특히, 뇌물을 받고 나라의 법률을 어기는 자는 무조건 사형에 처했다. 또, 균전제(均田制)라는 제도를 만들어 15세 이상의 남녀에게 국가가 일정한 토지를 나눠주는가 하면 반록제(頒祿制)라는 제도를 만들어 관리들에게 매월 봉급을 주었다.

특히, “미신은 나라에 혼란만 일으키는 근거가 된다”며 상서롭지 못한 책들은 모조리 불살라 버렸으며 혹여 미신과 관련된 책을 가지고 있기만 해도 사형에 처했다. 또,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그 계모를 아내로 삼고 형이 죽으면 그 형수를 동생이 삼는 패악도 모두 없앴다.

그런가하면 아무리 가까운 친인척이라 해도 그릇이 모자란 사람은 임용하지 않았고 비록 관계가 소원하다 하더라도 인재라 판단이 되면 서슴없이 등용했다.

여걸 풍태후, 비록 1600여 년 전의 인물이지만 웬만한 남성 못지 않은 정치를 펼쳤던 당대 최고의 지도자. 그녀에게서 여성이라는 소심함은 찾아 볼 수 없었으며 오히려 남자보다 더 강하고 힘있는 정책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렇다면, 세월이 흐른 오늘날, 혼란과 분열만을 거듭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풍태후와 같은 여걸은 없는 걸까, 허구헌날 이간질과 협작에 빠져 있는 남성들의 아집을 단번에 무너 뜨릴 그런 여걸은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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