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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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 김병학 편집국장, 언론학박사
  • 승인 2022.04.2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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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00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지도자를 들라면 단연 ‘황희’를 들 수 있다. 그는 세종 때 무려 18년이라는 세월 동안 영의정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세종을 보필했다.

우선 황희는 품성부터 남달랐다. 얼마든지 왕도 지낼만한 인격의 소유자였건만 백성들은 왕보다는 그를 더 추앙했다. 실제로 그는 국민들의 아픔과 고통을 공유하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농사법을 개량하여 농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으며 천첩(賤妾)소생 자식들에게 부과되던 부역을 면제해 주는 등 일련의 애민(愛民)정책을 시행했다.(물론 세종과의 합작품이었지만)

황희는 모든 국민들의 친구이자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비록 영의정이라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자신을 낮출줄 알았고 불의를 보면 상대가 누구든 그냥 넘어가지 았다. 폐위된 양녕대군이 여전히 기행을 일삼고 다니며 문제를 일으키자 주저없이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것만 봐도 그의 성품이 얼마나 강직하고 공평함에 바탕을 두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세종으로부터도 가장 신임을 받는 재상이었다. 특히 사대부들에게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조정 내에서 갈등이 생기면 으레 훌륭한 중재자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어쩌면 황희 못지 않게 황희의 인물 됨됨이를 알아 본 세종이 한 수 위인지도 모른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세종 말년에 불교에 심취한 세종이 궁궐 한쪽에 내불당을 지었다. 이것은 국왕이 불교신자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유교 국가를 천명한 조선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조정대신 내에서 한바탕 논란이 일었다. 그렇잖아도 불도들의 득세를 꺼리던 유생들의 반대는 하늘을 찌르는 듯 거셌고 궁 안에 불당을 놔두고는 정사를 논할 수 없다며 모든 집현전 학자들이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백성들에게는 유교를 숭상하라 하면서 국왕이 부처를 받든다는건 어불성설입니다. 하물며 궐내에 불당까지 짓는다면 백성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내불당 건립은 절대 안됩니다”“내불당은 선왕의 극락왕생을 기도하기 위한 곳이오. 자식의 순수한 마음조차 이해하지 못한단 말이오”

왕이 끝내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자 황희는 조용히 내전을 나왔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황희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학자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황희는 큰 것을 위해서라면 작은 것도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학자들은 결국 마음을 돌렸고 군신 간의 팽팽한 대립은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사심없는 황희의 충정이 얼어 붙은 정국에 소통의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작금의 시대가 그렇다. 지도자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그런 그와 국민들의 뜻을 적절히 포용하여 적절한 해결책을 도출해 내는 그런 사람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너죽고 나살자’라는 식의 오기와 집단이기주로 점철된 우리의 민낯을 황희가 보았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사람살이라는게 살다 보면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쉼없이 나타나고 또 나타난다. 그럴때면 지역의 지도자도 마땅히 떠오르는 방책이 서지 않을 수 있다. 바로 그러한 때 공명정대하고 바람직한 사고를 지닌 그 누군가가 나서서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가래로 막을 일도 얼마든지 호미로 막을 수 있는 법이다. 문제는 애정어린 충언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돼있는 지도자가 더 중요한게 아닐까. 아무리 정의와 애민을 바탕으로 하는 조언을 한다한들 한낱 의미없는 메아리에 불과하다면 이 또한 서로의 불행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옥천에 ‘황희’ 같은 사람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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