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은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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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은비녀
  • 배정옥 수필가
  • 승인 2022.06.16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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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이 창안 가득하다. 화장대에 앉아 스킨을 바르는데 손톱 가시가 일어나 있었다. 가시를 제거하기 위해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또로록’ 굴러오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의 은비녀였다. 그러고 보니 기일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지난 삼십여 년의 삶에 희로애락이 주마등처럼 밀려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예기치 못한 병환으로 몸져 누우셨다. 우리는 끝내 고령에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어야 했다. 

시골의 가난한 농부의 아내로, 종갓집 맏며느리로 남편과 칠 남매의 날개를 달아주려 평생을 논밭에서 살았던 어머니. 일제 강점기 색시난리, 위안부를 피하기 위해 남편도 없는 시집을 오게 되었다. 시집온 지 석 달 만에 산비탈을 일구고 손이 불어 터지도록 일을 해야 했다. 비가 와도 시원해서 좋다며 비를 맞으며 밭고랑에서 김을 매었다. 아버지는 일본에 가셔서 6개월 후에 돌아오셨다. 가난했던 삶이 여간 고달프지 않았으리라. 

농삿일 밖에 모르시고 무뚝뚝하셨던 아버지는 살면서 다정한 눈빛과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으셨다. 어머니는 팔십여 년 세월을 불평 한마디 없이 어깨 한번 펴보지 못하셨다. 바람 잘 날 없었던 한 많은 세월을 받아들였던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그 끈이 굵고 듣든하지 않아도 데면데면한 자식들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몸져 누우셨고 끝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하셨다. 어머니의 표정도 아버지처럼 굳어져 갔다. 말 수도 줄어들고 단단하게 조였던 나사가 헐거워지듯 어머니를 지탱해 주던 모든 관절이 느슨해졌다. 단단하게 잡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하는 불안감과 그 다음에 다가올 시간에 대한 두려움 속에 아버지는 점점 더 멀리 가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셨다.

한번 가시면 다시 못 올 어머님을 생각하며 온갖 정성을 다하던 어느 날, 평생 한 번도 자르지 않고 쪽진 머리를 고집했던 머리를 잘라 달라 하셨다. 평소에 몇 번 머리 감기 불편하신데 짧게 자르시길 권할 때마다 “부모님이 주신 머리카락을 자르고 어떻게 죽어서 부모님을 뵙느냐!”

한사코 마다하셨다. 은비녀를 볼 때마다 열녀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낭자머리를 올려 비녀를 찌른 여인은 한 번 정해진 인연 이외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하는 듯 귀밑머리 걷어 올린 단호한 단어가 떠오른다. 쪽진 머리에 야무지게 다문 입이며 단아하게 치마저고리 섶을 꼭꼭 여미고 은장도를 품은 여인이 생각난다. 어쩌면 은비녀는 고된 삶에 옹이 되고 가슴이 하얗게 바래어도 생의 지표가 아니었을까. 

때로는 한이 맺혀 울화병이 생기기도 했을 것이다. 지켜야 하는 가정과 자식에 대한 모정은 삶을 결박하여 구속하였지만 은비녀가 긴 시간을 지켜준 버팀목이 되었을 성싶다.

한동안 안 하시던 기침을 하셨다. 움푹한 검은 눈망울이 초점을 잃고 흔들리고 부서질 것 같은 어깨가 물기없는 나뭇잎처럼 바스락거렸다. 얼굴과 힘없는 목소리에서 힘겨운 고통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날은 풀기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어머니의 눈빛이 진지했다.

“얘야, 나 머리 자르고 싶다.”

생의 마지막 경계에 가까이 닿아가면서 쪽진 긴 머리를 감고 손질하기가 불편하셨는지, 그날의 단호했던 얼굴은 가벼운 발자국에도 힘없이 부서질 낙엽보다 더 푸석해서 주름만 도드라졌다. 그리고 한사코 집에서 자르길 원하셨다.

마당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어머니의 머리에서 해묵은 은비녀를 빼내었다. 그 순간 떨리는 손끝으로 따스한 온기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전류를 느꼈다. 늦가을 흰 서리가 하얗게 내린 은발 머리가 지난 겨울 내내 바싹 마른 갈대꽃처럼 부스스 봄바람에 흩어지며 허리 끝까지 툭! 하고 흘러내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흰 명주실같이 힘없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한참을 빗어 내리다 빗질을 하고 또 했다.

표정을 살피며 조금씩 잘라내었다. 서툰 가위질이 소리를 낼 때마다 어머니의 인생도 잘려나가는 것 같아 온 신경이 곤두섰다. 잘려 나간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부서질 것만 같다. 쑥스러워하시는 단발머리의 소녀가 내 앞에 있다. 가슴에서 소리를 냈다. 그 허전한 마음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으실까. 애써 모른척하며 거울을 드렸다. 어머니는 거울 안을 요리조리 들여다 보더니 낯설어 하시며 거울을 보고 또 보고 머리를 만지고 또 만지셨다. 그리고 한동안 밖을 나가시지 않으셨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모진 세월의 물살에 어머니는 삶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늦가을 들판에 내린 하얀 서리 같은 머리카락은 진이 다 빠진 듯 이리저리 쓰러졌다. 
그렇게 봄이 가고 유독 그 해의 질척이던 긴 장마와 찌는 듯했던 여름도 가고 추석을 간신히 넘긴 어느 날, 어머니는 국화꽃 향기 속에 묻혀 삶의 끈을 놓치시고 다시 오지 못할 영면에 드셨다.

어머니의 손끝으로 평생을 일궈내신 당신의 자리에서 한 해 두 해 동살로 비추는 햇살을 보며 어머니가 무척이나 그립다. 평소에 하시던 말씀이 귓전에 맴돈다. “영원히 싸우고 사랑해야 하는 것은 오직 인생뿐이다.” 반백이 가까워지는 지금 어머님의 가슴에 깊게 패였을 웅덩이처럼, 채워지는 것보다 비워야하는 것이 더 많은 삶을 지탱케 했던 은비녀! 희생과 헌신, 가치의 소중함을 잊을 수 없다. 어머니의 은비녀를 조심스레 예쁜 한지에 싸서 보석함에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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