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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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60)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06.23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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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말 한마디 없이 미국으로 온 후 병이 나서 누워서만 지내고 있다. 미국에 엄마, 언니가 이민을 와 있어서 미국으로 왔는데 엄마한테 미국에 오게 된 사연의 자초지종을 다 말씀드렸더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찌 너한테 그런 몹쓸 짓을 하고 왔느냐고 대노하셨다. 태어나서 엄마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너한테만은 죄짓고 싶지 않아서 집문서를 가지고 두 번이나 찾아갔던 것인데 네가 받아 들이지 않았지. 내가 너한테 큰 죄를 짓고 미국으로 오기 전에 남편하고도 대판 싸웠어. 남편이 나에게 네가 인간이냐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 그렇게 하고 말도 없이 미국으로 떠나려는 내가 사람도 아니라며 얼마나 나를 두들겨 팼는지…. 말없이 맞고 있었어. 내가 죽을 짓을 했으니까. 내가 벌 받아 병이 났는지도 모르겠어. 너한테는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용서해.”

나는 친구의 편지를 읽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평생 남의 것, 남의 돈이라고는 1원도 탐낸 적이 없던 정직한 친구가 어쩌다가 사업에 투자해서 이런 불행의 늪으로 빠졌을까 싶어 기가 막혔다. 무엇보다 친구가 아파 누워있다는 말에 마음이 아팠다. 평소 친구가 병이 나면 언제나 용산고등학교 앞에 있는 한의원에 가서 약을 지어 먹어야 낫는다고 말한 것이 불현듯 생각났다. 그날따라 비가 구질구질하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두 살 난 큰아들을 안고 급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용산고 앞으로 갔다. 용산고 앞에서 내려서 우산을 펴들고 아들 손을 잡고 둘러보니 한의원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한의원으로 들어가서 원장 님한테 약을 지으러 왔다며 혜숙이 이름을 대고 전에 단골로 다니던 사람이니 그 처방을 찾아서 그대로 약을 지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혜숙이 이름을 찾아봐도 그런 사람은 없다며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본인이 아니면 처방을 공개할 수 없는 것이라 약을 지어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나는 의사로부터 양해를 받고자 하는 수 없이 내가 오게 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아무리 친구가 내 돈을 떼먹고 미국으로 갔지만 친구가 아프다는데 친구한테 약을 보내서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 친구는 이 약을 먹어야 병이 낫는다고 전에 들었으니 꼭 약을 지어 미국에 보내야 한다고 통사정을 했다. 그때 번뜩 혜숙이 성(姓)이 희귀성 이라서 남편 성을 따서 등록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죄송하지만 김혜숙으로 다시 찾아봐달라고 부탁드렸다. 

짐작이 맞았다. 친구 집 주소가 신림동 맞느냐는 물음에 나는 보석을 찾은 듯 기뻤다. 원장은 찾은 처방대로 약 20첩을 지어주었다. 약값이 얼마냐고 물으니까 7만 원인데 반값 3만5천 원만 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에 돈 떼먹고 미국으로 도망간 친구를 위해 이 비 오는 날 아기를 데리고 그 친구 약을 지으러 오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면서 그런 사람도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 약값을 다 받을 수가 있느냐며 그래서 반 값만 받겠다고 덧붙였다. 처음 본 내 이야기에 공감해 준 한의원 원장님의 배려와 호의가 감사할 따름이었다.

뉴욕에 한약 보따리를 전해준 부처님 같은 남편

문제는 지어온 한약 보따리를 미국 친구에게 보내는 방법이었다. 이 고민을 남편에게 말했더니 걱정하지 말라며 자기가 뉴욕 출장 가는 길에 가져가서 전해주겠다고 했다. 대부분은 돈도 떼먹은 친구한테 한약은 무슨 한약이냐며 펄펄 뛸 텐데 그 한약을 손수 미국까지 가져다 전해주겠다니 그 고마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남편이 우러러 보였다. 염치없지만 나는 친구 집 전화번호와 함께 부피가 꽤 되는 한약 20첩을 건넸다. 한약으로 트렁크가 반은 차는 듯했다. 

남편이 뉴욕 출장에서 돌아왔다. 한약은 친구 집에 전화했더니 남동생을 내보낸다고 하여 남동생을 만나서 잘 전해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뉴욕 공항에서 해프닝을 겪은 모양이었다. 냄새나는 한약을 공항 직원들이 마약인가 싶어 의심해서 짐 검사에 시간을 오래 끌어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70년대 중반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 여행을 별로 하지 않던 시절이고 더군다나 미국에서는 한약에 대해서 잘 인식이 되어 있지 않은 시절이라 그런 애로를 겪은 것이다.
그 후 친구 혜숙이가 혼자 미국으로 떠난 후, 한국에 홀로 남아있는 남편이 마음에 걸렸다. 싸우고 들어갔기에 이대로 헤어져 살다가는 영원한 이별이 되어 이혼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마침 설 명절이 다가 왔다. 나는 친구 남편에게 전화하여 설 다음 날 우리 집에서 떡국이나 한 그릇 같이 먹자고 했다. 친구 남편은 의외의 내 전화에 부담을 갖는 것 같았으나 결국 오겠다고 했다. 설 다음 날, 우리 집에 와서 전과는 달리 불편해하는 친구 남편에게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혜숙이 없이 새해를 맞자니 쓸쓸하지요? 혜숙이 대신 내가 떡국이나 한 그릇 따끈하게 드시게 오라 한 것이니 많이 드세요.”

떡국 한 그릇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며 나는 그에게 말했다. 

“혜숙이 때문에 걱정 많이 하고 화도 많이 났지요? 그러나 나는 괜 찮아요. 혜숙이가 나쁜 마음으로 만든 일도 아니고 일부러 거짓말한 것은 더욱 아니고, 돈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생긴 일이니까요. 혜숙이가 잘못 판단한 건 있지만 용서하세요. 어디 가서도 혜숙이만큼 순수하고 정직하고 올곧은 여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인간 자체가 나쁜 것하고 사업에 투자해서 실패한 것하고는 엄연히 다른 것이니 혜숙이와의 관계에서 나쁜 생각을 절대로 하면 안 돼요.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미국에 가서 혜숙이하고 이전처럼 다정한 부부가 되어 살아가세요. 그 착한 혜숙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죄의식에 견딜 수 없어서 병이 다 났겠어요? 제발 혜숙이를 용서하고 혜숙이의 좋은 점을 떠올려 이전의 다정한 부부로 돌아가세요. 제 걱정은 절대 하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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