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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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
  • 손수자 수필가
  • 승인 2022.09.2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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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한풀 꺾인 여름, 60대 중반쯤 된 듯한 낯선 부부가 남편의 친구 부부를 따라 우리 집에 왔다. 

차에서 내린 부부는 서로 손을 다정하게 잡고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낀 듬직한 체격이고 그의 아내는 상냥하다. 우리 부부도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뜰로 안내했다. 

뜰을 구경한 일행이 마당 가에 서서 계곡을 내려다보더니 물가로 내려갔다. 선글라스를 낀 낯선 남자는 베란다에 서서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 돌계단을 내려가기 불편한 몸인가 싶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서 계곡으로 천천히 내려갈 것을 권하자 빙그레 웃으며 그냥 서 있는 게 좋다며 사양했다. 

계곡에서 올라온 손님을 집안으로 모시어 차를 대접하면서 비로소 선글라스를 낀 분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시력을 잃게 되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신경을 쓰게 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그는 대기업의 중역으로 있다가 작은 기업체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IMF로 회사가 부도를 맞고 빚에 쪼들리면서 건강도 나빠졌다. 갑자기 앞이 잘 안 보여 안과를 찾았을 때는 급성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했단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계곡으로 내려가기를 권했던 내가 오히려 미안했다. 

차를 마신 후 모두 숲으로 들어갔다. 지팡이 대신 아내의 손을 잡고 숲속 길을 걷는 그를 시각장애인이라고 여길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는 귀담아 들은 풍경을 마음속에 스케치하고 물감을 입히면서 풍경화를 완성하는 듯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이르자 아내와 함께 소나무를 안아보고 숲 체험장 평상에 앉아 얼굴을 하늘로 향하기도 한다. 주변 풍경에 대해 소곤소곤 설명해 주는 아내의 말에 귀 기울이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 부부의 모습을 바라보는 내 눈이 촉촉해졌다.

임도를 걸어 들미골 칡소에 이르렀다. 숲과 어우러진 폭포가 시원스러운 물소리로 일행을 맞는다. 바위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흰 물줄기와 아담한 물웅덩이 그리고 금강소나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에 손님들이 탄성을 자아내자 선글라스를 낀 그 분은 폭포 물소리에 가슴 속이 후련하다고 한다. 그는 한동안 서서 명상에 잠기는 듯했다. 어쩌면 가슴속 한을 이곳에 모두 토해버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의 뒷모습이 내게 무겁게 다가오면서 연민을 자아냈다. 

폭포를 뒤로하고 낯선 부부와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조잘거리는 물소리에 감동하고 간간이 지저귀는 새소리에 즐거워한다. 솔바람이 실어다 주는 숲의 향기에 취한다고 한다. 상기된 표정으로 자기가 그린 마음속 풍경을 말하기도 한다. 물소리로 계곡의 깊이와 물의 양을 가늠하고 코에 스치는 향기로 나무와 풀꽃을 이야기한다. 

볼 수 없는 눈으로 환히 보는 듯 주변 환경을 말하는 그의 묘사력이 놀랍다. 그는 마음의 눈으로 생생하게 보며 느끼고 있는 듯했다. 

감나무 밑에 모깃불을 피우고 모두 둘러앉았다. 바비큐 그릴에 고기를 구우며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공감한다. 예기치 않게 닥친 절망스러운 삶을 희망적인 삶으로 전환한 낯선 부부의 노력은 진한 감동을 안겨 준다. 무엇보다도 시각장애 남편과 의기소침한 자녀들을 다독거리며 살림을 꾸려온 그의 아내가 존경스럽다. 

일거수일투족 남편의 눈이 되고 손발이 되어 온 부인은 오로지 남편이 건강하기만을 바란다. 앞을 못 보면서도 아내를 지긋이 챙기는 노신사! 노부부의 곱고 깊은 사랑이 부럽기도 했다. 

그들이 차창을 열고 손을 흔들면서 떠났다. 그 모습이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 부부도 손 흔들어 배웅했다. 마음의 눈으로도 무엇이든 볼 수 있음을 알게 한 노신사, 그들이 남기고 가는 감동의 여운이 길게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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