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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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그림자
  • 지옥임 수필가
  • 승인 2022.09.2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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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터진 석류알이 보석처럼 익어가는 계절이다. 같이 공부하는 문우들과 야외 수업 겸 나들이를 갔다. 

찾아간 곳은 인심 좋은 화가 아내와 시인 남편이 사는 곳이다. 뒷산이 오리의 목을 닮았다 해서 ‘올목’이라는 동네다.

엊그제만 해도 청댓잎 같던 벼들이 싱싱하게 물이 올라 아직은 가을이 저 멀리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누런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올목에 도착하니 풍성한 가을 속으로 빨려드는 것만 같다. 우리를 반겨주기라도 하는 듯 집 주위 언덕에는 향기 짙은 들국화를 비롯해 가을꽃들이 만발해 있다.

서릿바람에 한들거리며 애처롭게 피는 들국화, 옛날에는 어디를 가나 지천에 널려있던 꽃이었는데 요즘에는 관상용으로 심지 않으면 보기 드문 꽃이 되었다. 이곳에도 시인 부부가 정성 들여 심은 덕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귀한 선물을 안겨 준다.

여기는 내가 자랄 때 드나들던 곳이다. 고모가 조실부모하고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이곳으로 시집왔다. 이 동네 뒷산을 철봉산이라고 부른다. 철봉산 너머에 살면서 호랑이가 나온다느니 여우와 늑대가 있다느니 말도 많은 속골 골짜기를 지나 언니와 동생들이 여러 명 있어 재미가 있던 고모네 집에 시도 때도 없이 놀러가곤 했다.

그때는 다섯 집이 사는 작은 동네였다. 아래윗집을 이어주는 깨끗하게 비질해 놓은 고샅길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 길을 따라 음식 속에 정을 담아 나르던 꼼예네와 꽃단이네는 다들 도회지로 나갔다. 

동네가 있던 자리는 잡나무와 풀이 우거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여기던가, 저기던가 기웃거려 보았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그저 가물가물하다.

고모네 집 뒤에 있던 소나무 한그루가 활엽수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남아 올목송이라는 이름을 달고 노송이 되어 강가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때 있던 감나무인지 메마른 고목이 한쪽 가지가 잘려나가 수족을 잃은 듯 서 있지만 감은 주렁주렁 열려 가을의 정취를 한층 더해 준다.

산 좋고 물 좋으니 노후에 인생을 즐기려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시멘트로 집을 지어 살고 있다. 산수 경관이 그림 같던 강가에 거울같이 맑던 물은 어디를 가도 볼 수 없다. 강둑으로 몇백 미터나 줄을 지어 늘어섰던 버드나무 그림자가 강 건너에서 볼 때 장관이었는데 물속에 비친 물그림자가 많이 낯설고 삭막하다.

몇 그루의 나무가 남아 옛날처럼 반쯤 기울어져 물을 들이마시는 건지 빨아들이는 건지, 아니면 긴 세월 보고 배운 강태공의 흉내라도 내는지 낚시질을 하는 것처럼 늘어진 가지를 강물에 푹 담그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그래 맞아 저거야’ 저 나무 아래는 오리들이 떼를 지어 떠다녔고 버드나무를 말뚝삼아 언제나 그 자리에는 나룻배가 매여 있었다.

이 동네에는 정해진 별도의 뱃사공이 없어도 초등학교 입학만 하면 누구라도 사공이 되어 노 젖는데 이력이 붙었다. 그래서 학교를 오가는 길이나 강을 사이에 두고 사는 또 다른 고모네 집을 다니는 데도 걱정이 없었다.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그 나룻배도 없어진 지 오래인 듯하다. 나룻배가 지나다니던 자리에는 야트막한 다리를 놓아 자동차가 동네까지 들어갈 수가 있다. 옛날처럼 비탈진 밭에 곡식들이 익어가는 윤기 주르르 흐르는 동네는 아니지만 새로운 것으로 단장을 해서 눈길이 가닿는 곳마다 풍요로운 가을이다.

옛날에는 깊은 산속에서나 볼 수 있던 으름과 다래를 언제 심었는지 엉클어져 주렁주렁 열려 햇볕 가리개가 되었다. 머루 다래 넝쿨 아래 놓여 있는 벤치는 여기에 오는 이들에게 자연을 만끽하며 편이 쉬어갈 수 있는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들도 벤치에 앉아 인정이 많아 남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문우가 싸가지고 온 음식들과 갑작스런 방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반가워하며 이곳에서 자급자족한 이것저것을 대접받았다.

이 가을이 집주인 화가 내외를 닮은 듯하다. 푸근함과 정감 넘치는 부부는 여기에 들어온 지가 십여 년이 넘었다고 한다. 긴 머리를 한 그분들은 예술가 티가 물씬 풍기기도 한다. 훼손되어 잊혀져가는 풍경을 그림과 시로 영원히 남기라고 신이 화가 부부를 이곳에 보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절경을 보며 시상을 떠올리고 화폭에 담아 후세 사람들에게 길이 남길 대작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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