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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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74)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11.10 1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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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가 결혼하고 나서 남들로부터 ‘남편이 공처가’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척 억울해했다. 사실은 크고 작은 모든 결정은 모두 남편이 하고 나는 남편 하는대로 따르기만 한다고 말하면 한 사람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내가 남편 한테 늘 겉으로는 이기고 속으로는 지고 산 이유는 결혼 초기부터 남편이 하는 말이 듣고 보면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에 남편 앞에서 나는 언제나 학생 같이 살았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첫날 남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결혼으로 인해 부모님이 네 분이 되었어요. 네 분 부모님께는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무조건 잘 해드려야 해요. 부모님은 우리 보다 늙으셨으니 먼저 돌아가실 것이고 이제는 경제력도 건강도 우리보다 못하시고 배움도 우리가 더 배웠으니 부모님한테는 아무것도 따지지 말고 잘해드려야 하는 거요. 또 하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은 돈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건강이지요. 돈은 건강이 있으면 벌면 되지만 건강이 망가지면 모든 것을 잃게 되니까요. 그리고 한 가지 부탁 할 것은 앞으로 친척 간이나 가까운 가족일수록 돈을 꾸어주고 받는 일은 없도록 해요. 만일 형제나 친척이 돈이 필요하다고 빌려달라고 하면 우리가 가진 돈 중에서 우리가 꼭 쓸 돈을 제외한 가능한 범위에서 얼마가 됐든 그냥 쓰라고 주도록 해요. 가까운 사람끼리 돈을 꿔주고 받고 하다 보면 반드시 돈도 못 받고 사람도 잃게 되니 어차피 그럴 거면 처음부터 얼마라도 그냥 쓰라고 주는 것이 옳은 방법이요. 그래서 돈은 은행과 거래하는 게 원칙이오. 또 우리가 남에게 베푼 것을 빨리 잊어야 섭섭함이 생기지를 않는 법이요. 베푼 것을 머리에 두고 있으면 내가 한만큼 상대에게도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어 자칫 좋은 관계가 나빠질 수 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당신은 외모에는 더는 신경 쓰지 않 아도 되니 이제부터는 좀 더 성숙하고 품위 있는 어른으로 성숙해 가기를 나는 더 바라요.”

너무나 공자님 같은 남편 말에 나는 뭐라고 사족을 달만한 틈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알았다고만 대답하고 잠자코 학생처럼 듣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결혼한 후 첫 월말이 되어갈 무렵, 남편은 내게 KAL 월급날이 며칠이냐고 물어 25일이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24일 저녁에 흰 봉투를 하나 내게 내밀며 “이 봉투에 돈을 좀 넣었으니 어머니께 당신 월급 중에서 어머님 용돈 쓰시라고 드리는 것으로 해서 내일 월급날 드려요. 그러면 어머니께서 며느리를 얼마나 기특해하겠어요?” 했다. 시어머님과 며느리 사이까지 배려해서 월급봉투 까지 대신 마련해 준 남편의 깊은 배려에 나는 또 놀라고 말았다. 나는 남편이 말한 대로 다음 날 시어머님께 “어머님 오늘 제 월급에서 어머님 용돈 조금 봉투에 넣었어요. 필요하신 것 있으시면 두고 쓰세요.” 했다. 시어머니께서는 정말 감동하셨다. “아니 네가 힘들게 번 돈을 내 용돈까지 챙겨주다니, 아니. 나는 괜찮다.” 하시며 사양하셨으나 표정은 이미 너무 좋아하셨다. 그 후 시댁과 함께 산 만 3년간 단 한 번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남편은 흰 봉투를 만들어 매달 24일이면 내게 줬다. 그러면서 남편은 내 월급이 얼마인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어찌 그뿐이랴. 시부모님을 제외하고 시동생 시누이들의 많은 생일을 솔직히 나는 다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온 가족의 생일을 수첩에 적어놓고 모든 동생의 생일 전날 내가 출근하기 전에 돈을 넣은 봉투를 내게 주며 퇴근길에 시동생 시누이에게 줄 간단한 생일 선물을 사 오라고 일러주었다. 시부모님 생신 선물은 내가 이미 챙기는 것을 아는 남편이 동생들에게까지 마음을 쓰는 남편을 보며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결혼하여 마음이 멀어졌다고 생각할까 봐 끔찍하게 아끼고 살던 동생들을 챙긴 것이었다. 물론 형수와의 관계를 고려한 측면도 있었음을 나는 알았다.

남편은 내게 한 가지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부모님 생신이나 추석, 설 명절 때와 매달 드리는 용돈을 어머님께 드릴 때는 절대로 동생들이 있거나 혹은 다른 누구도 있는 자리에서 돈을 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자식을 낳아 당신 손으로 기저귀를 갈아 채우며 키운 그 자식한테서 이제는 용돈을 받아 써야 하는 어머님의 심정을 헤아려 드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어머님의 입장과 자존심을 자식으로서 지켜드려야 하는 것도 용돈 드리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니 용돈을 드릴 때는 반드시 어머니 혼자 계실 때 드려야 한다는 남편 말은 나로 하여 금 진심으로 감동케 했다. 나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깊고 깊은 자식의 효심이란 바로 저런 마음이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나는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돈 봉투는 반드시 어머님 혼자 계실 때 드리는 도리를 지켰다. 

또 내가 결혼하고 3년간 시댁 식구와 함께 사는 동안 우리가 바깥 외 출을 하게 되면 9시를 넘겨 들어온 적이 거의 없었다. 자식으로서 집에 계시는 부모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시어머님과 같이 사는 동안에는 집에서 친정어머니에게 전화 거는 일도 삼가고 살았다. 하루는 막내 시동생이 나한테 말했다.

“형수님이 나한테 도련님이라고 하고 존댓말을 쓰니까 형수님이 더 어려워요.”

잠시 후 시어머님이 나를 부르셨다. 

“초등학교 3학년 밖에 안 되는 시동생이니 도련님이라고 존댓말 쓰지 말고 그냥 편하게 이름 부르고 반말로 하는 것이 기형이가 더 편하 다고 하니 그리해라.”

나는 고민이 되어 친정어머니께 그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친정어머니께서는 반대였다.

“네 시동생이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이지 평생 3학년 9살이라더냐? 애들은 금방 커서 어른이 되고 또 금방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데, 그렇게 어른이 된 시동생한테 이름 부르고 반말할 거냐? 그냥 하던 법도대로 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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