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념 속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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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 속의 하루
  • 권예자 수필가
  • 승인 2022.11.1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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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책을 읽다가 옆길로 새기를 잘한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차동엽 신부님의 ‘무지개 원리’를 읽다가 그만 옆길로 빠져 하루를 잡념으로 보냈다. 

시작은 ‘생각을 다스리면 감정이 조절된다’라는 항목에 예시된 소크라테스와 아내 크산티페의 일화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전에도 여러 지면에서 많이 들어온 말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더니 나를 계속 귀찮게 했다. 거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그에 딸려서 처용이 생각나고 천관녀까지 끼어들어 잡념 때문에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정말 크산티페는 BC 400년경부터 현재를 통해 지상 최고의 악처로 불려야 할 만큼 나쁜 여자일까? 

내 생각은 그와는 반대이다. 젊은 크산티페는 키가 작고 못생겼으며 뚱뚱한 데다 웃옷도 걸치지 않는, 처참한 몰골의 늙은 소크라테스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그녀는 악처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독배를 마실 때까지 자식을 키우며 그의 옆을 지킨 아내였다. 

깊은 철학을 한답시고 재물도 들여오지 못하는 남편. 언제나 제자들에 둘러싸여 밤낮없이 토론이나 하면서 처자식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남편에게 어느 여자가 짜증을 내지 않겠는가? 그래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녀가 남편을 생각했던 마음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닌 것 같아 악처란 오명을 씌운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그녀의 행동을 탓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내가 보기엔 정말 가관이다. 아내를 난폭한 말(馬)에 비유하는가 하면 그녀의 잔소리를 귀담아듣기는커녕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 크산티페가 잔소리를 퍼붓다가 남편에게 물 한 바가지를 확 끼얹었을 때 소크라테스는 화를 내는 대신에 “천둥이 친 다음에는 비가 오는 법이지” 하고 태연하게 말한다. 아내는 화가 나서 속이 터지는데 이것이 남편이란 사람이 할 말인가? 물론 크산티페의 태도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좋은 것만도 아니건만 원망의 화살은 철학자를 비껴가서 그의 아내에게 꽂힌 채 2,400년이 되도록 뽑히지 않고 있다.

나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처용에 대하여서도 관대하기가 어렵다. 처용가(處容歌)를 살펴본다.

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이 가사에 의하면 처용은 달이 휘영청 밝은 아름다운 밤에 아내는 팽개치고 밖에서 저 혼자만 늦게까지 놀다가 돌아왔다. 거기서 안 좋은 장면이 목격되었다면 먼저 진위를 가려서 아내를 다독여 주었어야 한다. 잠들었던 아내는 역신을 남편으로 알았을 것이고 그 상황에서 많이 놀랐을 터이다. 그러나 처용은 이 절박한 대목에서 아내는 배려하지도 않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역신은 그의 배포에 감복하여 꿇어앉아 빌었고 그 후로 처용의 그림자만 보아도 가까이 오지 않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 경우 아내의 처지는 참으로 야릇하게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신라 김유신의 화랑 시절, 유신은 아름다운 천관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것을 안 어머니 만명부인은 아들의 심신 수련에 방해가 될 듯하여 그녀와의 관계를 끝내도록 충고하였다. 하루는 유신이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를 태운 말은 옛 습관대로 주인을 천관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기다리던 연인이 오는 것을 본 천관은 얼마나 기뻤을까? 모르긴 해도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연인을 맞으러 달려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은 자신의 칼로 말의 목을 단칼에 베고 돌아서 버린다. 그 육중한 말이 목을 잘려 덜컥 쓰러지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게 끔찍하고 무섭다.

이 부분에서 나는 언제나 숨이 턱 막힌다. 내가 이러한데 그 일을 당한 천관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기록에는 천관이 김유신의 무정함을 원망하여 글을 지었다고 하는데 가사는 전하지 않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그 유래와 천관원사(天官怨詞)란 가명(歌名)만 전한다고 한다. 당시 김유신이 천관에게 자신의 처지를 전하고 따뜻한 위로의 말을 남겼으면 삼국통일에 무슨 지장이라도 생기는 것이었을까? 

오래전에 아산 현충사에 갔을 때였다. 임진왜란 평정 후에 선조가 내린 교지 내용을 보고 많이 놀랐다. 임진왜란에 가장 공이 많은 일등공신 세 사람은 이순신, 권율, 원균으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사람 대부분이 이순신은 충신, 원균은 간신이라는 이분법적 인식하고 있던 때였으니 놀랄 수 밖에. 그러나 지금은 여러 학자의 노력으로 원균도 이순신에 버금가는 용장이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처럼 옛 이야기 속에는 어느 한 사람을 돋보이려고 그림자가 된 억울한 많은 사람이 숨어 있다. 그리 본다면 지금도 누구인가 빛나는 한 사람을 위해 그늘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 좋은 책을 읽다가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샛길에 빠져서 양처인 크산티페를 만나기도 하고 삼국통일의 주역이 아닌 냉정한 남자로서의 김유신도 만나게 되었다. 결말도 없이 생각만 들끓었던 하루였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다. 이건 아마도 크산티페의 남편이 남긴 명언 때문일 것이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생각(고뇌)하는 인간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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