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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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90)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2.11.1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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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호응과 관군의 방해

조헌이 삼도(三道)에 격문을 띄우고 전국의 의인 열사들이 호응하기를 기다렸다. 그의 격문에는 왜적에 대한 적개심과 나라의 운명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든 대신들의 무능함 그리고 이러한 국난을 함께 극복할 것을 바라는 솔직하고 격동적이며 강한 호소력이 담겨 있었다. 평범한 백성들이 활과 칼을 들고 전장에 나선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의병장에 대한 신뢰와 명망이 절대적이었다.

비록 공주에서 다시 격문을 띄우고 대대적인 모병에 들어가긴 하였으나 어려움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관군과의 관계가 가장 큰 문제였다. 충청도 관찰사(觀察使) 윤선각(尹先覺, 1543~1611 이후에 尹國馨으로 개명))은 지방 수령들과 논의하여 병정으로 나갈만한 장정들이 의병으로 나가게 되면 관군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의병모집을 방해했다.

조헌은 순찰사 윤선각을 찾아갔다. 당시 관찰사가 각 도(道)의 군사 지휘권을 가진 순찰사(巡察使)를 겸하게 되어 있었다. 윤선각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겸 순찰사로 행정과 군권을 모두 쥐고 있었던 것이다. 조헌은 의병을 일으키는 대의(大義)를 역설하고 순찰사의 협조를 요청했다. 다행히 윤선각은 조헌이 내 세우는 대의명분(大義名分)에 동조하고 함께 일하기를 청하면서 의병모집을 서두르기로 합의했다. 관군과의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자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며칠 사이에 1,000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다. 

조헌 선생의 기병 소식에 의병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구름같이 모여 들자 뜻밖에 음흉한 인물이 이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바람에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순찰사 윤선각의 밑에는 안세헌(安世獻)이란 음흉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본래 포악하고 행실이 좋지 못하여 임진란 초에 우리나라 사람을 죽여 그 머리를 베어서 왜적의 수급(首級)이라고 속이고 공훈을 요구했다. 조헌이 그 죄를 창언(昌言 사리에 맞는 말) 한 적이 있었다. 안세헌은 그 일로 조헌 선생에게 원망과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 자가 조헌의 의병 모집을 방해할 술책을 부렸다. 그가 순찰사에게 이간질하기를 “공(윤선각)은 한 도(道)의 병사와 말을 가지고도 일찍이 조그만 공로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조헌이란 사람은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공보다 먼저 채찍을 잡지 않았잖습니까. 그가 만약 의병을 얻게 된다면 싸움터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공의 죄를 반드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라며 조헌에게 협조할 경우 앞으로 큰 화가 미칠 것이라고 모함했다. 윤선각은 안세헌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관할 수령들에게 공문을 보내 의병에 나선 자들의 부모나 처자식을 모조리 잡아 가두게 했다. 이때 청양 현감 임순(任純)도 공주 감옥에 갇혔다. 순찰사는 임순任純)이 조헌의 의병모집에 100여 명의 사졸(士卒)을 보냈다는 명목으로 현감을 잡아 가둔 것이다. 순찰사가 안세헌의 농간에 넘어가서 의병을 압박하자 조헌 선생을 따라 의병에 나선 장정들은 부모와 처자식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에 발길을 돌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 무렵 각도에서 크고 작은 규모의 의병이 일어나 적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당시의 의병 상황을 선조 수정실록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선조 수정 실록, 선조 25년 6월 1일 자, 각도에서 의병이 일어나다>
 
제도(諸道)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당시 삼도(三道)의 수신(師臣)들이 인심을 잃은데다 변란이 일어난 뒤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밉게 보아 적을 만나기만 하면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그러다가 도내(道內)의 거족(巨族)과 명인(名人)이 유생들과 함께 조정의 명을 받들어 창의(倡義)하여 일어나자 듣는 사람들이 격동하여 원근에서 응모하였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을 얻었으므로 국가의 명백이 그들 덕분에 유지되었다. 호남의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영남의 곽재우(郭再祐)·정인홍(鄭仁弘), 호서의 조헌(趙憲)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관군과 의병이 서로 갈등을 일으켰고 수신(師臣)들 거개가 의병장과 화합하지 못하였다. 적이 온 강토를 휩쓸고 임금이 국경 끝 의주까지 피난한 난리에도 관군과 의병장의 갈등이 심했고 순찰사 윤선각 역시 조헌이 기병을 성공하기 일보 직전 약속을 저버리고 안세현의 모함에 빠져 의병 모집을 방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는 공주에서 의병모집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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