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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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75)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11.17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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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생각해보면 친정어머니 말씀이 옳았던 것 같다. 막내 시동생이 지금은 50대 후반이 되어있는데, 그때 시동생이 원한다고 이름 부르고 반말로 굳어졌다면 절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역시 법도를 따라서 나쁠 것도 없고 자존심 상할 것은 더욱 없었다. 결혼 후 3년간 시댁에서 신혼살림을 했지만 크게 불편한 것 없이 살았다. 어머님의 사랑과 보살피심이 내가 자란 친정어머니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볼 때 남편은 공처가이고 나는 늘 큰소리만 치는 마누라로 본다. 그러나 골프 칠 때도 이래라 저래라 아직도 가르치는 남편을 보고 친구들은 말한다. “내가 그렇게 골프 칠 때 잔소리하면 나는 집에서 쫓겨날까 봐 입도 뻥끗 못 하고 사는데 아직도 그렇게 큰소리치 고 사냐?”고. 내가 그렇게 지고 사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어머님은 우리 집안에서 왕 노릇 해야 하고 당신 또한…

3년이 되자 어머님께서 “너희도 이제 분가해서 너희끼리 오손도손 살아 보아라.” 하시는 말씀에 나는 “저는 어머님하고 같이 사는 게 더 좋아요. 제가 따로 나가서 어떻게 살아요? 어머님 그냥 같이 살래요.” 했더니 “내가 반찬 몇 가지씩 해다 줄 테니 나가 살아봐라.” 하 셨다. 나는 시댁에서 분가하는 것이 싫어서 남편에게 내 뜻을 말했더니 남편은 의외로 “이제 당신이 어머니를 포함하여 시집 식구들과 정도 들어 이젠 우리 가족이 되었으니 나가 사는 게 맞다. 우리 어머니 성격도 여자로서 굉장히 강하시고 보통 분이 아니시다. 그런데 당신도 사실은 우리 어머니와 비슷한 성격인데 시집에서 어머니와 너무 오래 살면 어차피 두 여자 중에 한 사람은 희생해야 집안이 편하게 살 수가 있게 되어있다. 내게 어머니는 나를 낳아주신 세상에 단 한 분 밖에 없는 어머니이고 당신은 평생을 함께할 단 하나의 소중한 아내이니 두 여자 중 어느 한쪽도 희생하고 죽어 살면 병이 나서 안 된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 집안에서 왕 노릇을 하고 살아야 하고 당신은 당신대로 분가해서 주부로서 왕 노릇을 해야 하기에 어머니께서 먼저 분가하라고 말씀하 실 때 그냥 분가하는 게 좋겠다는 내 생각이다.”

남편 말은 또 한 번 내게 인간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감동 그 자체였다.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최고의 판단이라고 생각하며 삼십 대 초반 나이에 어쩌면 저런 넓고 깊은 사고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순간 내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일찍 부엌에 나갔을 때 시어머님께서 내게 해 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너는 시집 하나는 잘 왔다. 우리가 돈이 많은 큰 부자는 아니지만 네 남편은 마음이 바다같이 넓고 깊은 사람이다.” 

그때 나는 솔직히 “당신 아들만 최고라는 말인가?” 하는 삐딱한 마 음이 조금 들었는데, 이제야 나는 어머님의 그때 말씀의 그 깊은 뜻을 깨달았다.

분가 후 어머님은 말씀하셨던 대로 몇 달간은 막내 시동생을 통해 반찬을 만들어 보내주셨고 다음 해부터는 본격적인 맏며느리 역할이 시작되었다. 추석, 설 명절은 우리 집에서 전 식구가 다 모였는데 시누이들까지 와야 시어머님이 좋아하셨기 때문에 9남매와 아이들까지 전체 38명의 대가족이었다. 남편은 형제자매 모든 식구가 모이는 것이 좋아서 설날만 되면  은행에서 빳빳한 새 돈으로 봉투를 준비하여 손주들한테 세뱃돈으로 줄 돈을 시어머님께 항상 챙겨드렸다. 그뿐만 아니라 형제들과 사위들 심심풀이용 화투까지 사다 놓고 담요에 깔아주며 각 개인당 2만 원씩 판돈까지 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으나 정작 본인은 화투를 하지 않았다. 

시부모님 생신과 어버이날은 꼭 내가 챙겼다. 전체 식구 38명이 모 여 식사를 하려면 웬만큼 큰 식당은 어림도 없어 생신날이 되면 장소 물색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다른 집들처럼 형제들이 십시일반 돈을 거두어 부모님 생신을 모시는 것은 맏아들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남편이나 나나 똑같았다. 맏이로서 당연히 부모님 생신은 모셔왔는데 워낙 대식구이다 보니, 한번은 동서들이 미안했는지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내자며 봉투를 내밀었다. 하지만 안 하던 짓이라 마음이 오히려 더 불편해서 이것도 아니다 싶어 그다음부터는 하던 대로 우리가 냈더니 역시 마음이 더 편했다. 

나는 평소 교수들이나 친구들이 부모님 장례를 치른 후 형제들끼리 부의금 문제로 싸우고 형제끼리 의가 상하는 것을 보며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시부모님 두 분 장례식에 들어온 부의금은 그대로 가방에 넣어두었다가 장례식이 끝난 날 9남매와 함께 모두 우리 집으로 왔다. 그러고는 방명록을 형제들에게 돌려 각자 자기 조문객 이름 옆에 본인 이름을 쓰도록 했다. 그런 후에 조카들을 불러 방명록 표시대로 부의금 봉투를 분류하도록 하고 형제 이름을 쓴 아홉 개 대 봉투에 부의금 봉투를 담아 그대로 9형제에게 나눠주었다. 장례비용은 물론 맏이인 내가 다 낼 생각을 하고 각자 형제들 몫을 그대로 나눠준 것이다. 각자 자기 손님 부의금을 그대로 돌려받았으니 형제들 간에 불 평이 나올리 만무했다. 물론 부모상이니 자기도 좀 장례비에 소액이라도 보태겠다는 형제가 있으면 그것도 자유의사를 존중했다.

나는 매사 가정의 대소사에 있어 다른 형제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고 맏며느리로서 내가 할 도리를 다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것을 일찍 터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맏아들, 맏며느리로서의 권위도 서고 집안의 위계도 분명하고 또 그에 따른 대우도 받았다. 남들은 9남매의 맏며느리 노릇을 어떻게 하고 살았느냐고들 했다. 하지만 시누이가 넷이나 되고 동서들이 넷이었지만 우리는 형제간에 말싸움 한번 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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