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대] 정체성 없는 ‘청맹(靑盲)과니’ 정치인에게 고(告)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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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정체성 없는 ‘청맹(靑盲)과니’ 정치인에게 고(告)함
  • 김용환 기자
  • 승인 2023.02.09 1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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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규  ‘옥천향수신문’  대표
최장규 ‘옥천향수신문’ 대표

당신은 명찰, 꼬리표, 
딱지 중 무엇을 달고 싶은가

정치인이라는 명찰은 왜 달고 다니는가? 정녕 그대는 명찰과 꼬리표 그리고 딱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가. 정체성 없는 ‘청맹(靑盲)과니’ 정치인들이 하도 딱하여 옥천군민을 대신하여 쓴소리를 하려 한다. 옥천에 겉으로는 번드르르하지만 실제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정치인이 가끔 눈에 띈다. 무릇 정치인은 국민이나 군민의 입장을 대변하고 공직자를 관리 감독하는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 정치인이 하찮은 선심성 민원 하나 해결해주고 받는 표 하나에 헤헤거려서는 안 된다. 물론 학연이나 지연 그리고 혈연에 얽매여 갉아 먹는 표를 만들어서도 안 된다. 이에 더하여 정당을 보고 표를 주거나 구걸하는 우를 범하는 정치인이나 유권자가 존재해서는 더욱 아니 될 말이다. 

며칠 전 A씨가 한 정당에 가입했다는 후문이 돈다.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또 무소속으로 바삐 움직이는가 싶더니 다시 한 정당에 소속되었다고 말이 많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소박맞고 보따리 싸서 친정으로 다시 들어갔다.”라고 비아냥거린다. 다른 이는 “정치인이 다 그렇지. 뭐 정체성 그런 것이 있나? 그걸 바라는 군민이 바보지.”라며 애써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혹자는 “이제 정치 인생 끝났어. 그런 사람을 뭘 믿고 찍어 줘.”라며 혀를 끌끌 차고 돌아선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린다. 정치인은 이 수군거림을 외면하고 당선만 되면 끝이라고 거들먹거리고 돌아다닌다. 유권자들은 정체성 없는 정치인 앞에서는 부끄럽고 마뜩찮은 악수를 하지만, 뒤에서는 더러운 마른침을 퉤 뱉어 버리기 일쑤다. 

정당이나 정치인의 최고 목표가 정권 획득에 있다고 하자. 이해한다. 그런데 정권 획득은 군민이나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에서 비롯되면 아니 된다. 적어도 유권자를 실망시키는 일은 벌이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정치이고, 정치인이다. 같은 정치인이라도 누가 달면 명찰이고, 어떤 이가 달면 꼬리표이고, 또 다른 이가 달면 딱지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인이 정체성을 잃으면, 정치인이라는 큼지막한 명찰은 구겨진 꼬리표로 전락하고 만다. 이렇게 전락한 꼬리표를 명찰인 줄 알고 으스대는 정치인도 있다. 그 정치인에 대한 꼬리표는 시간이 지나면서 유권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다시는 회복되지 않을 나쁜 여론이 형성되고 만다. 

그 여론은 민심을 반영하여 정치생명의 막바지를 뜻하는 ‘딱지’로 굳어지게 되는 법이다.

명찰과 꼬리표 그리고 딱지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사전 중에서도 다음국어사전을 인용하려 한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고, 국민들의 정서를 현대적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표현‧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명찰은 “이름이나 소속 등을 적어 가슴에 다는 표”로, 꼬리표는 “어떤 인물이나 사물에 으레 따르는 평가나 평판”으로 쓰여 있어 다소 부정적인 기능에 가까운 단어이다. 딱지는 “거절이나 퇴짜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을 때 쓰이는 단어인 모양이다. 시골 옥천이라는 소읍의 작은 신문사 대표인 필자가 왼새끼를 꼬아 본다. 명찰을 단 정치인과 꼬리표가 붙은 정치인 그리고 퇴짜를 맞아 코딱지만도 못한 딱지가 붙은 정치인을 말이다.

제발 정치인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며 옥천군의 군민을 단 한 번이라도 귀한 존재로 여겨주길 바란다. 정체성을 갖춘 아니 갖추지 못하더라도 꼬리표나 딱지가 붙지 않은 정치인으로 자라길 빈다. 부디 정체성을 찾으려 노력하는 명찰을 단 정치인이 옥천군민 곁에 싹트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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