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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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105)
  • 조종용 작가
  • 승인 2023.03.09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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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기병후소(起兵後疏)    

조헌은 의병을 일으킨 일과 활동 상황을 한 번도 임금에게 별도로 보고하지는 않았다. 청주성을 수복한 다음에 처음으로 전후의 사정을 보고하는 장계와 더불어 기병후소(起兵後疏)도 함께 올린 것으로 보인다. 장계는 8월 1일에 기병후소는 8월 11일 쓴 것으로 되어있다. 다음은 기병후소 전문이다.

기병후소(起兵後疏)
선조 25년(1592) 임진(壬辰) 8월 11일 
   
 
북으로 관하(關河)를 바라보며 피눈물로 사배(四拜)하옵고 주상전하께 삼가 말씀 올리나이다. 국운이 불행하여 왜적이 우리나라를 얕보고 침공하여 옴으로써 종묘와 사직은 잿더미가 되었고 성궐(城闕)은 빈터가 되었으며 전하께서 난여(鑾輿)를 타시고 압록강 변까지 파천(播遷)하시니 혈기 있는 사람은 애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신이 우광(愚狂)하여 일찍이 낭관(郞官)을 지냈을 뿐이온대 낮은 직위로써 말을 높이 하여 무거운 죄를 범하였으므로 기축년(己丑年) 이후로는 죽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 초택(初擇) 속으로 내쫒으시는 성상의 자애를 입어서 신이 몸소 농사 지어 어머니를 봉양하게 하여 주시어 천지와 부모의 은혜가 이에서 더할 수가 없습니다. 신의 도리로는 마땅히 목숨을 버리고 있는 힘을 다하여 성조(聖朝)에 보답하여야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지난 2월 18일 신의 처상(妻喪)을 당하고 4월 20일에야 겨우 장사를 지내려고 할 즈음에 왜적의 선봉이 인동(仁同 구미)과 선산(善山) 사이에 침입하여 오니 신의 주거와는 이틀 거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청주(淸州) 동면(東面)에 들어가 노모의 피난처를 구하던 중 뜻밖에 적병이 또 보은(報恩)에 침입하고서 청주를 함락하였기 때문에 길이 막혀 한 달이 넘어서야 옥천(沃川)으로 돌아왔습니다. 의리상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힘을 다해 싸워야만 전하의 행차가 환도(還都)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외롭고 천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찍 따르지 않으므로 재차 격서(檄書)를 띄우게 되자 응모하는 사람이 자못 많았습니다. 동시에 왜적이 옥천지방을 넘봄으로 이곳의 방어가 급하여 병정을 모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 순찰사(巡察使)가 관군(官軍)의 응모를 허락지 않으므로 이미 모집한 군사도 도로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신이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한들 어찌할 수가 없어서 몇 사람의 동지와 더불어 역군(役軍) 수백 명을 모집하여 7월 4일에 기(旗)를 세우고 두루 해군(海郡)을 돌아다니면서 병정 1천 명을 모집하여 북으로 행진하려 하였으나 맨주먹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한 치도 안 되는 병기도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의기(義氣)있는 백성들이 힘을 모아 협조해 주었으므로 간신히 계획을 세워서 활 수십장(數十張)과 편전(片箭) 수십부(數十部)를 마련하였으나 이것을 가지고 강한 적병을 방어함은 제 스스로도 역시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달 분의 군량만 얻으면 진군하려고 하였습니다. 주현(州縣)은 이미 양곡이 떨어졌기 때문에 순찰사(巡察使)가 군량 6백 석을 제급(題給)하였으나 현품이 쌓여있지 않으므로 판출(辦出)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열읍(列邑) 유생들의 도움으로 촌려(村閭)에서 약간의 양곡을 얻게 되자 진군을 하였습니다.

이달 8월 1일에 청주(淸州)의 서남쪽에 진군해서 승군(僧軍 영규의 군대)과 합세하여 성 밖에서 종일토록 역전(力戰)하고, 한편으로는 방어사(防禦使)의 제군(諸軍)을 독촉하면서 서문 밖까지 바짝 쳐들어가자 탄환이 비오듯 하여 우리의 의병이 많이 상하고 반면에 왜적도 또한 편전(片箭)에 많이 상하였습니다. 적병은 화살을 맞으면 곧 옮겨가므로 그 죽은 숫자는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짐작컨대 적의 정예병은 이 싸움에서 다 없어졌으므로 밤에 그 시체를 불태우고 나서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도망쳤습니다. 적을 쫓아가면 힘들이지 않고 이를 잡을 수 있을 줄 믿으나 화살을 너무 많이 써 버린다면 근왕(勤王)의 행진에 참된 성실을 다하지 못할 염려가 있으므로 그만두었습니다. 

                  - 기병후소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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