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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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106)
  • 조종용 작가
  • 승인 2023.03.16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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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기병후소(起兵後疏)

행군이 온양(溫陽)과 아산(牙山)에 당도하여 각 읍의 군량이 다 모이는 것을 기다려서 회전(回傳)할 수 있는 힘이 생긴 뒤에 군사를 인솔하고 전진한다면 명나라의 군대를 만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명군과 힘을 합해서 양경(兩京)을 회복하고자 하오나 군졸이 고단하고 힘이 미약하여 왜적의 횡절(橫截)을 입을까 두려우니 신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조선을 도우신다면 거의 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으로 믿습니다. 신이 그윽이 나라의 재화(災禍)로 인한 실패의 까닭을 생각하여 보니 모두 계미년(癸未年) 이후로 신용을 잃음이 많으므로 민심은 믿지를 않고 군사는 투지가 없어 종횡함을 보고서도 한 사람도 나와서 대적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관문(關門)이 함락되고 온 나라가 썩어서 문드러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구업(舊業)을 회복하려 하오면 먼젓번의 잘못을 거울삼아 뒷날의 걱정과 근심을 방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개 북쪽 오랑캐의 변란이 있었을 때 오랑캐의 머리 베이는 것만을 중하게 여겼으므로 그 머리만 바치면 천한 사람도 양인(良人)과 같이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양곡을 바치는 자는 서얼(庶孼)을 면하고 또 관직을 줌으로써 이때를 당하여 힘이 있는 자는 그 용맹을 다하였으며 양곡이 있는 자는 그 재산을 쏟아 놓으니 삼천리에 변방을 지키러 가야하고 곡식을 운반하는 수고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변란이 평정된 뒤에는 권력 있는 신하가 먼 계획을 못 하여 먼젓번의 약속을 위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힘껏 싸운 공로가 모두 그 장수에게만 돌아가므로 북도(北道)의 용사들은 많은 원한을 품고, 생업을 잃으면서까지 양곡을 운반한 남쪽의 부인(富人)들도 나라의 은혜는 조금도 입지 못하였습니다.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은 오직 정언신(鄭彦信)에게 아부한 문인(文人)과 무리(武吏) 뿐입니다. 아! 나라의 인심을 뭉치어 굳어지게 하는 것은 오직 인의와 충신이옵니다. 정언신이 사사로이 내수사(內需司)의 물건을 소비하여 간민(姦民)에게 은혜를 베푸는 척 임금의 이목이 되는 문인을 두루 막아버림으로 김수(金睟)와 이광(李洸)이 높은 자리에 올랐고 정언신이 힘써 권당(勸黨)의 족속을 비호하여 정권을 잡은 사람의 칭찬을 구하므로 무리(武吏)의 일을 만들어 공을 요구하는 자들이 재물을 흩어 가면서 오랑캐의 머리를 사게 되자 서예원(徐禮元)의 무리가 중죄에서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몇몇 간사한 자들은 모두 당시의 어진 바가 되어, 혹은 관찰사(觀察使)가 되었고 목사(牧使)나 부사(府史)의 직에 올랐습니다. 김수(金睟)는 영남에서 잔인하고 포악하여 일도(一道)의 원망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적병이 이르니 먼저 도망하였기 때문에 백성이 나와서 대적하지 않았으므로 온 나라가 화를 입게 되었습니다. 서예원(徐禮元)은 이름은 용장(勇將)인데 왜적이 김해로 향하니 먼저 놀라서 달아나고 적에게 화살하나 쏘아보지 않음으로써 일도(一道)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이광(李洸)은 군부(君父)의 근심을 급히 여기지 않아서 처음에 호남의 군중(群衆)을 영솔(領率)하고 공주(公州)에 이르러서는 앞으로 갈까 말까 주저하다가 계속 근왕(勤王)의 행진을 하게 되자 진위(振威)에 도착해서 일부러 지체하면서 삼도(三道)의 군사가 흩어지고 영구히 수습하기 어렵도록 하였으니 이 삼인(三人 )은 정언신(鄭彦信)이 어질게 여기고 간당(姦黨)의 보배로 삼은 바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전자(前者)의 한 행위를 보면 간사한 자를 돕고 임금을 속였으며 조정을 갈팡질팡하게 하였고 나라를 그르쳤습니다. 또 후자(後者)의 한 행위를 보면 국난을 돌보지 않고 몸만 보전하며 군사를 패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큰 죄는 지금껏 수령을 보존하고 근왕 하던 신각(申恪)만이 홀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나라가 이백 년 동안 혁혁한 업적을 보전하는 것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벌이 이같이 어긋나서 나라가 장차 위태한대도 달려가서 구원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들 소인들의 화가 한결같이 이러한 극도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이제 구업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소인배(小人輩)를 그대로 두고서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 기병후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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