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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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버리다
  • 김기순 수필가
  • 승인 2023.03.1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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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겅 아래 쪼그리고 앉아 돌을 고른다. 동글납작 예쁜 돌을 골라 요리조리 만지작거리다 그냥 놓고 일어선다. 

전에는 계곡이든 바닷가이든 누름돌로 보이는 돌이 있으면 짊어지고 와서 팔팔 끓는 물에 삶아 햇볕에 말려 누름돌로 쓰곤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언제부턴가 누름돌 역할을 하는 용기들이 나왔고 나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편리에 매료되어 신개발 용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장아찌나 오이지 동치미 등을 담글 때 건지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눌러주던 우리 집 누름돌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동글납작한 돌을 보면 줍고 싶은 충동을 감추지 못한다.  

작년 가을 이사 때도 누름돌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지 않아도 이삿짐이 많은데 쓸모없게 되었으니 버려야 하나 가지고 가야 하나. 망설이다 주섬주섬 끌어안고 오긴 했지만, 여전히 다용도실 한쪽 귀퉁이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모습이 영 주체스럽다. 이리 놓아도 어줍고 저리 옮겨보아도 마뜩찮다. 

흔하디흔한 것이 돌이라지만 인류 역사를 돌이켜 인간 생활에 돌만큼 요긴하게 쓰여 진 것도 없을 것이다. 용도도 다양해서 견고한 석축이나 석상, 농기구 등. 돌은 과학문명이 발달하기 이전부터 첨단과학시대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 무한한 소용가치를 충족하고 있다. 박물관이나 수목원에서 만나는 돌확이나 맷돌 같은 생활도구는 세월 뒤편에 밀려난 무가치한 유물이 아닌, 선인들의 삶을 돌아보고 또 다른 멋을 창조하는 의미부여로서 푸근한 정을 느끼게 한다. 옛날 생활 속에서 가장 친숙했던 돌을 꼽으라면 다듬이돌과 온돌방에 까는 구들장 그리고 다릿돌이 먼저 떠오른다.  

깊은 밤 달은 기울고 부엉이 울음마저 잦아들어도 또닥또닥 어둠을 수놓던 다듬이 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겨웠다. 다듬이질이란 직사각형 모양의 돌 위에 풀 먹인 무명천을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드려서 판판하고 반질반질하도록 구김을 펴주는 방법이다. 방망이 한 쌍을 옆에 끼고 마루나 방 한편을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있던 다듬이는 한 집안의 살림도구로써 귀한 대접을 받던 돌이었다. 

  한옥은 구들장을 이용한 온돌방이 대표적이다. 구들장이란 방바닥을 만들 때 깔아주는 넓적하고 편편한 돌을 말한다. 한옥을 지을 때 방을 만들기 위해서는 방고래 위에 구들장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바른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연기는 방고래를 타고 굴뚝으로 빠져나가고 구들장은 뜨겁게 달구어져 방바닥을 덥혀주는 원리다. 가끔 군불 지핀 따뜻한 아랫목이 생각날 때가 있다. 가족이 오순 도순 둘러앉아 시린 몸도 녹이고 얼어있던 정도 따뜻하게 녹여주던 온돌방이었다. 

어릴 적 친구들을 떠 올릴 때면 징검다리가 함께 끌려 나온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위에 생김새도 크기도 각기 다른 돌들이 물속에 잠길 듯 말 듯 놓여 있는 징검다리, 띄엄띄엄 멀어서 얄밉고 하냥 거기 그렇게 놓여있어서 고마운 돌이었다. 건널 수 있을까? 밟으면 발이 젖을 것 같은데. 바르르 떨다가 미끄러져도 까르르 즐겁기만 했던 어린 시절. 친구와 손잡고 조심조심 다릿돌을 건너던 추억은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그리움이다. 

가치를 따진다면야 하찮기 그지없겠지만 짜든 싱겁든 군소리 없이 제 몫을 다해준 누름돌. 근사한 수석이나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조각품도 아니요 곱게 다듬어진 옥돌이나 번쩍이는 대리석에 비할 바도 못 되는 쿰쿰한 냄새가 배어있는 누름돌. 그 누름돌을 오늘 버리려 한다. 그런데 못내 아쉬운 이 감정은 무엇일까. 소유욕의 소치라기보다 함께해온 세월만큼 옴살이 되어서이리라. 헤지고 낡아 손때 묻은 수첩 만년필 손거울 같은 소지품을 버리지 못하고 무슨 보물인 양 애지중지 간직하는 습성과 무관치 않으리라.   

한때 소중했던 누름돌을 버리지만 어디든 꼭 필요한 곳에서 귀한 용도로 다시 쓰여 지기를 바란다. 각공의 정 끝에서 예쁜 조형물로 만들어진대도 좋겠고, 혜안 깊은 정원사의 눈에 들어 백화난만한 화원에서 꽃들의 수호석이 되어도 좋겠다. 

어느 날 돌담길 따라가다 낯설지 않은 돌 하나를 만난다면 반가우리. 부디 멋진 변용을 기대하며 돌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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