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이문범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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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이문범 의병장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3.05.18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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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물고 순국한 이문범(李文範) 부자
 
임진왜란 때 금산 낙안진 전투에서 순국한 이문범(李文範) 의병장은 조선시대 옥천군(현재 영동군) 양산면 원당리에서 태어났고 조선 초기  대사성을 지낸 이거경(李居敬)의 손자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덕부(德孚), 호는 매헌(梅軒)이다.

 이문범 선생은 성리학에 밝았고 시를 비롯한 문장에도 뛰어나 지방 유림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벼슬살이에 뜻이 없어 고향에 은거하며 살았다.

팔순 노구 불구 의병 일으켜 금산으로금강 낙안진전투 아들과 생포됨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팔순이 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중봉 조헌 의병장이 당시 전라도 금산 금성면 연곤평에서 왜적과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지체 없이 아들 이시진(李時愼)과 함께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금산에서 싸우는 조헌 의병을 지원하기 위해 영동 양산에서 금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 금산을 향했다. 금산 가는 도중에 옥천(현재 영동) 양산 가선리와 금산 제원면을 가로지르는 금강 상류의 낙안진(落雁津) 나루터에서 왜적을 만나 의병부대를 지휘, 의병들과 온 힘을 다해 싸우며 전투를 치렀으나, 중과부적 열세한 병력으로 생포되고 말았다.

이문범 의병장을 사로잡은 왜적들은 항복하기를 강요하였으나,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왜적들에게 완강히 굴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왜적은 이 의병장 입에 돌을 물리고 모진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이문범 의병장은 끝까지 굽히지 않자, 그 옆에서 항거하던 아들 이시신과 함께 그 자리에서 죽여 순국하였다.

그러나 이문범 의병장 부자의 굳센 충절 심에 감복한 왜놈 장수는 그곳에 그들을 묻어 주고 :조선 충절자 이 부자 무덤“이란 목비를 세웠다. 후에 조선 조정에서는 이문범 의병장의 충절에 대해 정4품 사도시첨정의 증직을 내려 양산 봉암서원에 위패를 배향하여 매년 제를 올려 기리게 했다.

그의 동생 이충범(李忠範) 선생도 임진왜란 때 옥천동이 평산리 쌍봉서원에서 정립 선생 등과 옥천의병을 일으켜 영동 추풍령과 멀리 구미선산 낙동강까지 오르내리며 연전연승한 훌륭한 의병이시다

 다음은 임진년 가을 이충범 선생이 이문범 형님 부자의 시신을 낙안진에서 수습, 선영에 장례를 모시고 슬퍼하며 지은 시이다.

형님을 장사지내며 슬퍼하며 지은 시 
             
이충범 의병장 지음

아, 어진 우리 형님이여
평소 큰 절개를 지니셨네  선악의 정간(동량)을 내린 것이고 
원기가 크게 모이고 맺힌 분이라네
  
궤 속의  옥 제값에 팔지 못하고
산림에서 늙으며 팔순이 되었네

집에서 충효의 마음 전수하였고
자식에게 배움 그치지 말라 가르쳤네
준동하는 왜놈들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더러운 먼지 지나간 자리 피바다 되었네
집안의 동복 삼십여 명과 함께
대의를 외치며 치욕을 씻으려 하였네 
고제봉(고경명)의 군진에 막 달려가서는
격문을 보고 더욱 피가 끊어올랐네

그런데 삼십 리도 가지 못하고
고립된 군대 기와 무너지듯 궤멸했네
(금산) 낙안진에 가을바람 소리 싸늘한데
왜적 질타하는 그 외침 끊이지 않았네
하늘 위에 해와 별 떠올라서
그 마음 비치니 빛깔 찬란했네

돌무더기 시신 가득한 가운데
충성 어린 마음 강철처럼 굳세었네
아비와 자식 함께 순절하니 
금강 물 흐르는 소리 애끊어라
저 왜놈들 무슨 양식이 있겠는가
나무 베고 비석 무너뜨려 버렸네

국가의 원수 아직 갚지 못했으니
무슨 여가에 장례를 치르겠는가
돌아가 선영 아래 모시니
소나무며 잣나무 싸늘하게 쓰러지려 하네
늙은 이 몸 부디 죽지 않고
말이 없어 임금 호종하지 못하니이내 마음 누구에게 말할거나

쌍봉(옥천 동이)에서 의병 일으키니
고을 사람들 그리고 아들과 조카라네
미약한 힘이나마 임금께 보답하여
섬 오랑캐 쓸어버리겠노라 맹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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