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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옥임 수필가
  • 승인 2023.05.25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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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부터 신바람이 났다. 무슨 큰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남편에게 빨리 준비하라고 재촉한다. 워낙 성격이 낙천적인 남편은 누가 급하게 오라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모르겠다며 핀잔을 준다. 

대전 근교에 조그만 땅을 장만했다. 경관이 아름다운 산 밑자락에 갖가지 과일나무들이 둘러서 있고 토질이 제법 좋은 땅이다. 마침 때가 이른 봄인지라 무엇을 심을까 여기저기 둘러보며 구상을 했다. 여기는 상추, 여기는 감자와 토마토, 오이와 고구마를 심기로 했다.

가족들은 과일이나 따 먹으며 그냥 공기 좋은데 가서 놀다 오는 것으로 만족하고 농사일은 하지 말라고 한다. 

농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농사일을 지치도록 한 경험이 있다. 결혼과 동시에 농사일은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상 땅을 사고 보니 욕심이 생겼다. 옛날 어른들은 땅을 아끼고 귀하게 생각했다. 화전 밭을 일구어 부치기도 하고 아무리 구석진 곳의 못 쓸 한 뼘의 땅이라도 결코 놀리지 않았다.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땅이 노여워한다는 것이다. 

농부의 딸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 요즘 여기저기서 묵어나는 전답들을 볼 때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저 아까운 땅들은 어쩌면 좋을까?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으면서 걱정을 한다. 아이들은 아까울 것이 따로 있지 땅이 뭐가 아까 우냐며 괜한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 오랜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닌데 너무 많은 세대 차이가 난다. 

농사짓지 말라는 가족들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옛날 기억을 더듬어 가며 두렁을 만들고 골을 타서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었다. 

큰 볼일을 제외하고는 매일같이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뿌린 씨앗에서 싹이 나고 떡잎이 나오는가 싶더니, 본래의 제 모습을 갖춘 모양새가 드러난다. 튼실하게 자라는 모습이 여간 사랑스럽고 귀물다운 게 아니다. 우리 가족 모두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고 신기하다며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한다. 

밭에 있는 농작물들을 보고 있으려니 우리 아이들이 백일쯤 되었을 때가 생각난다. 깨끗이 목욕시켜 뉘어놓고 자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큰 걱정이 있어도 웃음이 났다. 

옹알이를 할 때에는 되지도 않는 말을 끌어 붙여 말을 했다고 우기기도 했다. 처음으로 ‘엄마’ 소리를 했을 때나, 혼자 일어서서 한 발짝 걸었을 때의 희열은 엄마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이다.

자식처럼 아니면 내가 심은 농작물처럼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고뇌 끝에 한편의 글이 완성되었을 때도 이와 같은 심정이다. 읽어도 읽어도 새로운 반면, 남들에게 내어놓기에는 살짝 부끄러운 면도 있지만 이 또한 내 자식처럼 소중하다. 

올봄 작은 농사를 지으며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깨달았다. 엄마의 마음, 작가의 마음, 농부의 마음은 시간과 돈과 정성을 들이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귀한 보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투자해도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이 성장해 가정을 이루고 결실을 맺은 것처럼, 때가 되면 이 농작물들도 우리를 기쁘게 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소박하기는 하지만 내가 쓴 글도 언젠가는 세상에 나가 극소수의 사람에게라도 감동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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