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칼과 망치, 시(時)·서(書)·화(畵) 아우르는 ‘종합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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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칼과 망치, 시(時)·서(書)·화(畵) 아우르는 ‘종합예술’
  • 이성재기자
  • 승인 2016.11.24 1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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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사정으로 중학교 졸업하고 극장 ‘간판장이’로 일해
30여년간 홀로 작업하면서 서각미술 전국 최초로 창시
고향인 이원면에 서각예술 총 망라한 박물관 건립 ‘꿈’

서각이란 글씨를 쓰는 서(書)와 새기는 각(刻)을 말한다. 글씨나 그림을 나무, 옥, 돌, 기와 등 기타 재료에 새기는 서각은 문자나 회화를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려고 한 행위가 목재나 돌 또는 다른 재질에 기록하여 표현하는 욕구로부터 시작됐다. 우리나라 세계최고의 목판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해인사 장경판전, 팔만대장경 그리고 고궁이나 사찰, 정자나 루의 현판(懸板) 및 주련 등이 훌륭한 서각 작품으로 남아있다. 특히 시(時), 서(書), 화(畵)에 병칭될 만큼의 높은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

서각은 현판, 비석 등의 전통각 기법에서 현재는 조형 서각으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서각은 서예와 조각, 회화적인 색채를 바탕으로 한 종합예술로 다양한 재료에 따라 독특한 멋을 낼 수 있다. 서각은 전통서각과 현대서각으로 분류된다. 우리 고유의 전통미를 살리는 전통서각과 달리 현대서각은 다양한 재료에 정형화된 미의 유형이 아닌 입체개념이나 조형개념을 추구한다. 이런 현대서각에 있어 선구자적 역할을 한 작가가 바로 현산 강 민(60) 선생이다.

일월오봉십장생

어린 시절 유난히 그림 좋아해.

현산 강 민(본명 강노형) 선생은 옥천군 이원면 현남리(現 이원리) 출신으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해 화가를 꿈꿨다. 가족의 반대와 경제적 형편 때문에 진학은커녕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만 했던 그는 좋아하는 그림도 그리고 돈도 벌 수 있는 ‘간판장이’의 길을 택했다.

강 선생은 이원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 때문에 대전에 있는 중앙극장, 신도극장, 시민관 등에서 극장 간판미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화가가 ‘환쟁이’로 통하던 시절 간판미술가들은 ‘간판장이’로 불리며 예술가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는 이원역에서 대전역까지 가는 차비 20원만을 들고 매일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출근을 해야만 했다. 그 당시 그림을 배우는 보조에게는 제대로 된 점심을 제공하지 않았던 상황이라 강 선생은 선전부(광고부)에서 밀가루를 얻어 페인트 통에다 수제비를 끊여 끼니를 때우는 등 어렵게 극장미술을 배우게 됐다.

그렇게 대전에서 2년 동안 극장미술을 배운 그는 부산 남포동에 위치한 제일극장에서 3년간 극장 간판장이 생활을 하고 옥천으로 돌아와 111연대에서 군 생활을 했다. 제대 후 경남 마산에서 관공서, 학교 등에서 기록화를 제작하는 ‘그린다’를 운영하며 상업미술에 뛰어들었다.

강 선생은 “학교 수업시간에 공부는 하지 않고 공책에 온통 그림이나 만화를 그려 선생님에게 매일같이 꾸중을 들었다”며 “사실 공부에는 취미도 없었고 그림의 매력에 푹 빠져 앞으로 그림으로 성공하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현산 강민 선생이 서각작품에 색을 입히고 있다.

상업미술과 서각 병행.

상업미술에 전념하면서 조금씩 돈을 벌기 시작한 그는 70년대 중반 김해 봉황동에 있는 동생에게 찾아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서각을 접했다. 생애 처음으로 접한 서각이 그동안 자신이 갈고 닦은 그림 실력과 만나면 자신만의 독특한 창작품이 나올 것 같아 서각의 길에 입문하게 됐다.

글이나 그림의 평면 작업을 벗어나 3차원적인 입체 조형의 세계를 보여주며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서각은 문화적 충격으로 그를 인도했다. 전통과 고전이 살아 숨 쉬는 서각예술에 매료된 그는 1980년대 마산으로 이주하면서 상업미술과 서각을 병행했다.

서각 연구실을 운영하며 낮에는 관공서, 학교 인테리어를 하고 밤에는 서각을 익히며 누구에게 배운 서각이 아닌 자신만의 서각예술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서각과 서예의 기초를 배우고 서각에 대한 인식이나 이론적 정립이 안 된 것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당시 각종 서각전시회나 서각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전국을 안 다녀 본 곳이 없었다.

강 선생은 “서각에 입문하면서 어떻게 하면 새김질을 잘 할까 나무나 재료 등은 어떤 걸 선택해야 할까 일을 하면서도 온통 서각 생각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나만의 독특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십장생 입각 작품.

현대의 멋에 전통 수용.

강 선생이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서각은 그림각, 조형각, 공예각 등 현대서각이다. 고유의 전통미를 살리는 전통서각과 달리 현대서각은 다양한 재료에 정형화된 미의 유형이 아닌 입체개념이나 조형개념을 추구한다. 전통서각에 조형성을 가미해 종합예술로 재탄생된 현대서각은 다양한 재료에 입체미를 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서각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겠다는 뚜렷한 신념을 갖고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하지만 무조건 전통만 고수하거나 현대적인 개념을 추종하는 것은 아니다. 채색의 경우 옛날에는 밤색이나 검정색이 주를 이루었으나 현대사회의 서각은 자연스럽게 채색이 변화하고 있다. 시대에 맞게 역동성 있는 채색이 또 따른 멋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통서각과 현대서각 각각의 매력이 있다며 전통을 이어가되 현대의 멋 또한 수용하는 진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강 선생은 너무 전통만을 고집하거나 너무 현대만을 고집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 중간 협의 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강 선생은 “서각미술 장르를 처음으로 창시하고 30여년 동안 홀로 서각미술을 연구하고 수 많은 시연을 통해 현재의 작품관이 생기게 됐다”며 “서각에 그림각을 더하는 더욱 전통적이고 현대적인 예술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전했다.

 

반야심경.

 

후학양성 위해 최선 다해.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강 선생은 후학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현산 서각미술관을 비롯해 인터넷 카페 ‘서각미술대학’을 운영하며 3000여명의 수강생을 지도하고 있다. 예전에는 젊은 여성들이 서각을 배우려는 비율이 높았는데 최근에는 중년 남성들이 서각을 배우는 추세라 한다.

회화, 서양화, 서예 등 다른 분야와 비교했을 때 서각은 6개월에서 1년 정도면 기본적인 기술을 배울 수 있어서 좀 더 손쉽게 시작할 수 있다고 한다. 나무를 다루고 글을 새기는 기술을 익힌 후 계속 작업을 하다보면 작품의 질이 높아진다. 작품을 만들다보면 궤도 변경이나 수정을 해야 할 경우가 많지만 이 또한 몰두하다보면 금방 시간이 갈 정도여서 한 번시작하면 그 매력에 금방 빠지게 된다.

강 선생은 “서각은 열정과 시간만 주어진다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온전히 열정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쉽지 않다”며 “배우려는 수강생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실력 있는 수강생을 발굴해서 키워나가는 것 역시 보람된다. 앞으로 후학양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강 민 선생은 고향인 이원면에 서각미술 박물관을 건립을 꿈꾸고 있다. 평생의 업으로 활동해온 자료와 작품을 모아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참고하고 관람할 수 있도록 서각예술을 총 망라한 미술 막물관을 만드는 것이 그의 마지막 목표다.

강 선생은 “옥천군에서 지원만 해준다면 내가 평생에 일군 작품 200여점과 앞으로 제작하는 전 작품을 모두 기증하겠다”며 “서각미술의 대중화와 옥천군을 알리는데 이바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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