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松 너란 녀석도 나처럼 질곡많은 삶을 살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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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松 너란 녀석도 나처럼 질곡많은 삶을 살았구나”
  • 박현진기자
  • 승인 2018.01.11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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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산에 올라 일출 촬영… 세파에 굴곡진 노송 보며 묘한 동질감
소리꾼 아내, 날 위해 생활전선에…이젠 내가 아내의 소리 찾아줄 때

“사진은 내 인생”이라고 말하는 ‘초로’의 사진작가가 있다. 철부지 어린 시절부터 칠순이 넘은 지금까지 꿈을 좇아 전국을 누비며 세상 이야기를 앵글에 담아내는 김영래(73) 옥천사진협회장. 그를 만나 사진과 함께 한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주>

 

김영래 사진작가

김영래(73) 작가는 오늘도 어김없이 산에 오른다. 매일 뜨는 해, 매일 찍는 일출이지만 날마다 느낌이 다르다. 흐린 날과 맑은 날, 운해의 다소나 바람의 세기 등에 따라 해의 빛깔은 천차만별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일상인 듯하지만 매일 다른 이야기가 앵글 속에서 출렁인다. 수없이 일출을 담았지만 또 산에 오른 이유다.
시간이 됐다. 일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어 올리다... 문득 멈춰 선다.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카메라. 20년 전쯤인가? 추암 촛대바위의 더 멋진 모습을 앵글에 담으려다 7m 아래 절벽으로 떨어진 적이 있다. 기우뚱 중심을 잃은 순간 ‘이대로 죽는구나’ 생각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품에 안고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어깨가 탈골되고 머리를 부딪치는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카메라는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이 놈이 뭐라고~” 실소를 뱉어내곤 다시 카메라를 들어 올려 초점을 맞춘다. 일출을 담으려던 렌즈에 늙은 소나무가 잡힌다. 좌로, 우로, 아래로, 위로 절묘하게 굽은 노송. 그 멋진 굴곡을 만들어내느라 얼마나 오랜 세월 세찬 비바람을 견뎌냈을까. “너도 나처럼 늙었구나. 자네도 나처럼 질곡 많은 세월을 살았구나”
사물을 보며 인생을 느낀다는 일흔세 살 노 작가는 “진부한 표현이라고 흉보겠지만, 사진은 곧 내 인생”이라고 말한다. 그는 적잖은 나이에도 아직도 일주일에 사나흘은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누빈다. “때론 지치고 때론 지겨워도 주어진 시간만큼 살아내야 하는 게 인생”이므로.

<해남 맴섬-일출> 매년 2월과 10월, 두 차례만 양쪽 바위 사이에서 해돋는 장면이 연출된다는 맴섬의 장관. 날이 흐려 해돋이를 못보면 다음 해를 기다려야 한다.

△ 천방지축 중학생에서 전문작가로
김 작가는 천둥벌거숭이였던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사진 찍는 일이 재미있고 신났다고 했다. 집에 소형카메라 한 대가 굴러다녔는데 그걸 들고 나가 친구들과 들, 산, 새와 나무를 찍고 서로의 모습을 담았단다. 그리곤 ‘집에 들어와’ 인화지를 물에 담가 사진을 직접 현상까지 했다.
그렇게 ‘마냥’ 좋았던 사진은 그러나 살다보니 멀어졌다. 그 열정을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일깨워준 것은 故 조영상(전 충청북도 사진작가협회장) 작가였다. 친구이자 동창이었던 조 작가의 권유로 마흔두 살에 정식으로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김 작가는 “조 작가를 친구지만 선생님으로 모셨다”며 “옥천지역 사진가들에게 조 작가는 영원한 스승님”이라고 말했다. 지역의 전통적 사진작가 모임인 ‘사진마당’이나 ‘옥천관성사우회’ 회원들 대부분이 모두 조 작가의 가르침으로 성장했고 한국사진작가협회 정회원으로 등록돼 ‘사진작가’ 호칭을 들을 수 있었단다.
그런 조 작가가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나자 김 작가는 다른 제자 동료들과 함께 죽향리에 ‘조영상 예술인비’를 세웠다. 그리고 조 작가의 뜻을 이어 또 다른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 후배 겸 제자들과 지금도 농구게임
김 작가는 사진작가 겸 체육교사다.
중앙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1970년 충주여고로 첫 발령을 받은 이후 옥천여고, 옥천여중, 옥천상고를 거치며 40년간 교편생활을 했다. 전공은 농구. 청소년여자농구대표팀 단장을 맡아 아시아는 물론 세계대회를 이끌기도 했다. 그가 키워낸 농구선수만 해도 박혜옥(전. 외환은행), 김수진(현. KB국민은행), 김소담(현. 국가대표) 등 이름만 대도 알만한 선수들이 많다.
2010년 정년퇴임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체육선생님으로 아이들과 운동장을 누빈다. 모교인 옥천중학교에서 방과후수업과 토요농구 프로그램을 맡아 새까만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김 작가는 “가르친다기 보다는 함께 뛰논다는 생각으로 다니고 있다”며 “땀 흘려 한판 뛰고 함께 짜장면 먹는 재미를 만끽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는 “한경환 옥천교육감이 ‘70 넘은 노인이 학생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며 여기저기 노익장을 칭송하고 다닌다”면서도 “그러나 그 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노익장이 아니고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라는 얘기다. 시범을 보이다가도 일단 게임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승부욕이 발동한단다. 그러나 그는 “나이 드니까 순발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라며 금방의 자신감을 번복하며 호탕하게 웃는다.
김 작가는 ‘퇴임 뒤에도 10년을 이어온 농구지도자 역할을 체력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할 생각”이라며 “이 나이에도 사진작가로서 전국을 누빌 수 있는 것도 체육선생으로 다져온 체력 덕분”이라고 말했다.

<추암 설화> 동해시 추암 촛대바위의 설경.

△ 아내 덕에 사진작가 생활 가능
김 작가의 부인 이순하(62)씨는 안양예고 출신으로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명인명창대회 등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등 입상 경력이 화려한 남도창 소리꾼이다.
이씨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옥천지역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의 무대를 독차지했다. 그러나 지금은 식당을 운영하며 일체의 활동을 못하고 있다.
식당 문을 닫은 늦은 밤, 가끔씩 장구를 치며 쏟아내는 부인의 ‘소리’를 듣노라면 김 작가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다. 아직도 소리를 잊지 못하는 아내를 위해 다방면으로 다시 소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봤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김 작가는 “일주일의 반 이상을 외지로 떠돌다가 돌아와도 이제껏 단 한번의 투정이나 잔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지금까지 오로지 사진만을 생각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덕분”이라며 “그동안의 내조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이젠 제대로 ‘외조’를 해야 하는데...”라며 안타까워 했다.

옛 조폐창 앞 은행나무 거리. 김 작가는 이 사진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 내가 찍어준 사진 찾아가세요
김 작가에게는 크고 작은 세가지의 소원이 있다.
첫째는 지난해 가을 예전 조폐장이 있던 은행나무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들에게 사진을 전해주는 것. 그들의 부탁으로 사진을 찍어줬지만 그후 연락이 오지 않아 주인 없는 사진이 돼버렸다. 김 작가는 “인생의 어느 한 순간도 귀하지 않은 시간은 없다. 내게는 겨우 사진 한 장일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소중한 기억일 수도 있다”며 “이 기사를 보고서라도 주인이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둘째는 그가 길러낸 제자 작가와의 5인전이다. 스승에게서 배운 지식을 전수한 제자들 중 대표 되는 5인방과 함께 올해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옥천지역 사진예술의 저변 확대를 소망했다. 김 작가는 “사진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연락만 해달라.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성심성의껏 가르치겠다”고 말했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옥천사진협회에는 지금 32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그는 “회원이 100~200명으로 늘어나길 바란다”면서도 “그러나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사진 사랑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사진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사진을 즐겨라. 즐겁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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