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분단과 이데올로기라는 거대 담론에 갇혀 매장되었던 혹은 영원히 매몰될 위기에 처했던 소중한 문화유산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정지용은 한국문학사에 공헌한 바가 지대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월북설’에 휘말려 공허한 세월을 보내야만 하였다. ‘월북설’이 나돈 이후로 40여년 가까이 작품은 물론 이름조차 제대로 표기될 수 없었다. 정지용(김기림 포함)에 대한 해금은 1978년 ‘연구개방원칙’ 시사 아래 문단 및 학계, 유가족, 매스컴 등의 거듭된 해금 촉구가 이어진 지 10년 만에 실현되었던 것이다.
정지용, 김기림은 북한에서조차 ‘자본주의 퇴폐 반동 작가’로 규정, 남북한 모두에게서 배척당함으로써 이른바 ‘휴전선 문인’이라는 서글픈 대접을 받아왔다.
이 해금은 문학을 이데올로기로 단죄해온 정부가 우리문학사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에 있다. 즉, 북한보다 먼저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문공부가 정지용, 김기림 외에 나머지 납·월북 문인들의 작품도 단계적으로 해금하겠다는 사실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조치는 정부의 ‘해금 단행’이라는 적극적 태도보다는 ‘해금 인정’이라는 소극적 태도에 불과하다는 반응이 지배적”(기형도, 「40년 불구 ‘한국문학사’복원 첫걸음」, 『중앙일보』, 1988. 4. 2. 14면.)이라고 적고 있다.
정지용은 김기림과 함께 1988년 3월 31일 납·월북 문인들 중 먼저 해금을 맞게 된다. 이때 지금은 작고하신 정지용의 장남 구관의 「아버지 해금 탄원이 나의 지난 10년 삶의 전부」(위의 신문, 같은 면)와 김기림의 장남 세환 씨의 인터뷰 내용을 차례로 전한다.
“한을 풀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지난 10년간은 아버님 납북자료수집 및 해금 탄원을 위해 뛰어다닌 것이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정지용의 장남 구관 씨(60ㆍ인천시 북구)는 38년 동안 그토록 기다려왔던 완전 해금이 이루어지자 눈시울을 붉혔다.
“53년쯤인가 충청도에서 피난살이를 할 때 아버님의 시가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이름도 정O용 등으로 표기되는 것을 보고 월북 누명을 쓰게 된 사실을 알았지요.”
정 씨는 부친의 해금이 우리 문학사의 복원을 이루는 계기가 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아버님의 전집이 출간됐을 때는 정부의 공식 해금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버님이 완전히 명예를 회복하셨습니다.” 김기림의 장남 세환 씨(56ㆍ서울)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 김원자 여사(76)를 끌어안고 기쁨의 오열을 터뜨렸다. 38년간 쌓인 한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50년 6월 28일 곧 돌아오겠다며 외출하시던 아버님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제 아버님이 월북의 누명을 벗었으니 여한이 없습니다.” 김 씨는 지난 10년간 부친의 해금 탄원을 함께 해준 문단, 학계, 매스컴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정부의 해금 조치에 대해 학계에서는 이미 재평가 작업이 마무리에 들어간 정지용, 김기림 두 시인에게만 국한시켰다는 점에 대해 비판의 시각을 보냈다. 우리 한국문학사의 복원작업에 두 시인만의 해금으로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학계의 반응은 이러하였다. 해금이 ‘상징적 효과’에 치우친 감이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우리문학사 복원작업을 위한 숨통을 텄다는 점, 청소년들이 애송할 수 있도록 교과서에 이들의 시가 실릴 수 있다는 점 등은 크게 기뻐할 일이라고 그 당시 상황을 말하고 있다.
해금 당시 정지용, 김기림의 해금으로 납·월북 작가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확대·심화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당시 기형도 기자는 “12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납, 월북 문인 중 이번 검토대상에 포함됐던 이태준, 박태원, 안회남, 백석, 오장환 등 26명 전원만큼은 조속한 시일 내에 해금해야 한다는 것이 문단 및 학계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미술계에서도 추진 중인 납, 월북 화가 해금 문제를 비롯, 모든 학ㆍ예술 분야의 납, 월북 문인의 순수 창작물을 해금하여야 한다는 견해도 받아들여져야 한다.”(기형도, 위의 신문, 같은 면)고 쓰고 있었다.
정지용, 김기림, 백석, 오장환……. 하물며 이 기사를 썼던 기형도 기자도 우리 곁에 없다. 사람은 떠났으나 그들이 남긴 글은 영원히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