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납·월북 작가의 해금은 한국문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대략 4단계의 과정을 거치며 지루한 길을 걸었다.
그동안 철저히 금기되어 바른 한국문학사의 정립에 파행을 자초하였던 작가와 작품들. 이들에 대한 일종의 부채로 국문학도들은 큰 짐을 지게 되었다.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다가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시대의 역사, 이를 우리는 잘 가꾸어야만 한다. 진실이 외면된 채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문학인과 문학작품에 족쇄를 채우는 어리석음은 더 이상 자행되지 않기를 바란다.
정부가 월북 작가와 관련된 조치를 취한 것은 몇 단계(김윤식, 「월북 작가 해금은 문학사 새 전기(轉機)」 - 7ㆍ19 해금에 붙여 -, 『동아일보』, 1988. 7. 20, 8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1978년 3월 13일 조치이다. 이는 월북 및 재북 작가 작품의 문학사적 연구를 순수학문의 차원에서 용인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1987년 10월 19일 조치이다. 이것은 순수학문의 차원에서 상업 출판의 수준으로 폭을 넓힌 조치였다. ‘정지용 연구’라든지 기타 월북 작가 ‘론(論)’의 상업적 출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셋째 조치는 1988년 3월 31일 조치이다. 정지용, 김기림의 작품 자체를 해금한 것이다.
넷째 조치는 1988년 7월 19일 조치이다.
네 번째 ‘월북문인의 해방이전 작품 공식 해금 조치’는 1920년대 이후 해방에 이르는 20여년의 문학사 공백을 40여년 만에 복원, ‘총체적 문학사’를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이미 실재했던 문학사실을 매장시켜 왔던 정치적 기준을 문학사적 영역에서 제거시킴으로써 우리 민족문학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전기(轉機)를 마련하였다.
이 해금조치의 배경은 정지용, 김기림 해금을 전후로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현실적인 월북 문인들의 작품집 출간 붐을 막을 명분이 없어 출판정책의 부재현상을 빚고 있었다는 데서도 찾아진다(기형도, 「20여년 문학사 공백 복원(復元)」, 『중앙일보』, 1988. 7. 19.)고 중앙일보의 기형도 기자가 제일 먼저 물고를 튼다.
다음은 간략하게 일간스포츠 기사 일부를 인용하여 본다.
정부는 7ㆍ7특별선언의 후속조치의 하나로 지난해 10월 19일 출판 활성화 조치 때 보류된 월북 작가 1백 20여명의 해방 전 문학작품에 대해 출판을 허용키로 했다. 정한모 문공부 장관은 19일 상오 기자 회견을 갖고 민족 문학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박태원, 이태준, 현덕, 백석, 임화, 이용악, 김남천 등 한국문학사 정립에 중요한 인물로 거론 되었던 월북 작가들의 8ㆍ15 해방 이전 문학작품을 공식적으로 출판 허용키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월북 작가 중 북의 공산 체제 구축에 적극적으로 협력 활동하였거나 현재 현저한 활동 등을 함으로써 북한의 고위직을 역임한 홍명희, 이기영, 한설야, 조영출, 백인출 등 5명에 대해서는 이번 조치에서 제외됐다. - 이 남, 「월북 작가 120여명 해방 전 작품 해금」, 『일간스포츠』, 1988. 7. 20. 중에서 -
1988년 7월 20일 ⓐ『일간스포츠』(「월북작가 120여명 해방 전 작품 해금」), ⓑ『동아일보』(「월북 작가 해금은 문학사 새 전기」, 「월북작가 해금의 의미」), ⓒ『조선일보』(「월북작가 백여명 해방 전 작품 해금」, 「문학사 “20년 공백” 전기」, 「주요작품 대부분 음성적 출간」), ⓓ『중앙일보』(「월북작가 작품 전면 해금」) 등 주요 일간지에서 앞 다퉈 발표하였다.
이렇게 끊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불편한 진실은 탈을 벗고 세상 밖으로 나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