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휀스·목재덱·조경식재·금속창호
주식회사 송암(대표 황인준·옥천농공길 53-26)은 디자인형 울타리와 목재데크를 직접 생산, 제작하는 조경전문업체다. 황인준(53) 대표는 “32세 때부터 시작한 송암은 자신의 뼈와 살과 같다”며 “아내가 말리지 않는다면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한다”고 말했다. 그는 2017년에서 2018년(19~20회기) 옥천로타리클럽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남부 3군 로타리클럽 지역 대표를 맡고 있다. 기업대표로, 봉사단체를 이끌어 가는 수장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황 대표를 만나 그의 기업경영 마인드와 봉사란 어떤 의미인지 들어볼 기회를 가졌다.
△고1까지 농삿일
동이면 지양2구는 그의 고향이다. 폐교된 군동초 13회 졸업생이다. 동이중, 옥천공고(현 충북산과고) 모두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1년에 몇 번 같이 다니던 친구들을 만나 당시의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랜다고 했다. 당시는 대부분 가난했다. 그가 살던 마을은 리어카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지게를 지고 날라 농사를 지었다. 그는 고1 때까지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었다. 그 당시 하도 고생해서 흙길을 가다 보면 울컥할 때가 있단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데리고 다니면서 약초 이름을 알려줬는데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던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단다. 아버지(고 황순만)는 그가 31살 때 돌아가셨다. 살아계실 때 그의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차후에 무엇을 할지 모르지만 네가 자라면서 고생한 모든 것은 살아가는 데 힘이 될 것”이라며 “지금은 살기 위해 똥지게라도 져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손에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정말 똥지게를 지기도 했다. 아버지의 모든 가르침은 현재 그가 살아가는데 큰 지침이 되고 있다며 당시의 이야기를 전했다.
△조경사업
황인준 대표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 조경기사 자격증을 따고 취직을 한다. 회사에 다니던 8개월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해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잔디라도 심겠다’는 심정으로 대전에서 면허를 내고 조경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고향인 옥천으로 들어와 사업을 펼쳤다. 처음엔 배타적이었다. 대전에서 면허를 내고 사업을 한다는 이유였다. 1998년 이곳은 조경에 대한 인식이 없던 시기였다. 시장도 그만큼 불모지였지만 그때가 호기였다. 처음엔 옥천 관내 뿐 아니라 영동, 보은, 청주까지 가로수 전지를 많이 했다. 홍보, 도면, 설계도를 들고 발로 뛴 결과 조경에 대한 인식도 차츰 생기기 시작했다. 업체가 없으니 경쟁력에서 월등히 앞서갔다. 옥천 관내 조경 쪽은 손 안 간 곳이 거의 없다. 2000년대 초반 마을 단위 정자 사업이 대단위로 이루어질 때는 한 해 50개를 제작 설치하기도 했다. 2013년부터는 디자인형 울타리와 목재 데크를 주로 시공 설치해오고 있다. 주식회사 송암은 깨끗한 도시환경을 만들기 위해 디자인휀스·목재덱 조달청납품, 조경식재·시설물, 금속창호 등의 제품을 생산, 시공, 설치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
그동안 사업은 즐거움이고 생계수단이었다. 누가 막지 않으면 365일 일했을 것이다. 요즘도 아내가 말리지 않으면 토요일, 일요일도 사업장에 와있다. 주변의 풀도 뽑고 근처에서 농사도 짓는다. 이곳은 내 뼈와 살을 묻은 곳이나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 모든 걸 걸어온 사업이지만 자식이 원하지 않으면 물려줄 생각은 없다. 딸이나 아들은 그들이 원하는 길,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하길 바란다. 내가 언제까지 할지 모르지만 같이하는 직원 중 사업을 원하면 직원에게 권유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직원들이 기량을 발휘해 이만큼 회사를 끌어왔고, 여러 부분 많이 참아 줬다. 앞으로 회사가 이윤 창출을 하는 만큼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힘써 나갈 생각이다. 또한, 군에 많은 도움을 못 줬는데, 지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마음을 내려고 한다. 이곳에서 사업을 20년 이상 하다 보니 이제 내수보다 외지로 확장 시켜 나갈 시기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봉사의 힘
황인준 대표는 19~20회기 옥천로타리클럽 회장을 맡았다. 현재는 남부 3군 로타리클럽 지역 대표를 맡고 있다. 얼마 전 3일간 로타리클럽 활동에 참여,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공부방을 꾸며줬다. 지역 청소년들에게 수상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봉사활동도 펼쳤다. 그가 옥천로타리클럽 회기 회장을 맡았을 때 사랑의 집짓기나 고쳐주기 봉사활동을 하러 수혜 받는 분들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환경이 너무 열악해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봉사활동에 임했던 것. 깨끗하게 단장한 집을 보고 환하게 웃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 행복했단다. 황 대표는 “처음에는 로타리클럽 활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봉사활동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게 많다”며 “봉사도 일종의 중독이 아닌가 싶다. 준 것 이상으로 느끼는 행복이 크고, 가슴속에 맺힌 한 같은 게 풀리는 기분”이라고 봉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이 같은 기쁨을 같이 공유하려고 회기 회장 때 15명을 로타리클럽 회원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황 대표는 “가난의 고통을 알기에 가난한 사람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것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이어 “로타리봉사활동 할 때마다 가족이 같이 움직이려고 했는데, 부모 입장에서 자식들에게 어려운 일을 시키고 싶지 않지만 딸(수지·대학생·22)과 아들(태웅·고1·17)이 현장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기특하다”고 기뻐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어려운 시절만 생각났는데 지금은 그런 굴레를 조금 벗어난 거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조금씩 비워내며 살아가려고 한다. 그동안 일하느라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했는데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동료, 후배들이 많이 생겼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같이 어울리고 부대끼는 지금이 좋다.
△사업가의 아내
32세 때 결혼했다. 당시 농협에 다니던 황 대표의 아내(임희자·49)는 방송통신대 법학과 3학년이었다. 황인준 대표는 같은 과 4학년으로 선후배 사이였다. 농촌에서 생활했던 유년시절의 정서가 서로 너무 잘 맞았는데 알고 보니 그의 아내 역시 동이면 세산리가 고향이었다. 그의 아내는 농협을 그만둔 후 조경기사 자격증을 땄다. 얼마 전에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중개사로 일하고 있다. 밤11시까지 공부하는 아내를 위해 외조는 자신이 했다며 환하게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