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문학인들은 시대적 조건 속에서 어떤 사상적 결정을 하여야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계속 놓여지게 된다. 정지용도 그랬을 것이다. 순수시를 쓴다는 것도 넓은 관점에서 보면 사상적 선택이고 정치적 목적의식을 반대하는 것도 또 다른 목적성을 드러내는 결과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과 부딪친 정지용의 유년시절도 또한 정신적 상흔이 난도질을 하게 된다. 정지용은 상처 입은 몸으로 문학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가 준 아픔을 굳은살이 박힌 채로 그렇게 건너고 있었다.
학교의 두 기둥 김규흥과 정치적 입지가 문제였다. 상해무관학교 설립과 고종의 비자금 문제 등으로 인해 김규흥은 1908년 3월경 중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더욱이 교장 민형식 마저 을사오적 암살계획에 찬동하여 후원금을 희사한 문제로 인해 黃州 鐵島에 유배되었으나 특사로 풀려나는 등 곤경에 처한 상황이었다. 두 기둥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가운데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얘기다. 뒤늦게 1909년 10월 1일 사립창명학교로 정식인가가 났지만 이때는 대한제국의 수명이 한계가 왔을 때다.
결국 창명학교는 사립학교의 기능을 잃게 된다. 한일병탄이 조약되기 한 달 전인 1910년 7월 30일(융희 4년), 사립창명학교는 옥천공립보통학교로 변신하게 된다(관보 융희 4년 8월 3일. 학부고시 제20호). 대한제국 학부대신 이용식은 新鉉九에게 1910년 8월 5일자로 옥천군수 및 옥천공립보통학교의 교장직을 겸임하도록 辭令을 내렸다(叙任及辭令, 『황성신문』, 1910. 8. 10.).
한편, “창립자가 김규흥이고 교장도 민형식으로 동일하다. 무엇보다 교사(전성욱)의 이직으로 인해 학교의 존립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연이 동일하다. 아무튼 6월 28일자 매일신보의 보도이후 진명이라는 명칭대신 창명학교에 대한 기사가 심심찮게 나온다.”(김상구, 『김규흥 평전』, 옥천군․옥천문화원․사)김규흥기념사업회, 2018, 29면)는 김상구의 의견에 수긍이 간다.
“…형(범재 김규흥)과 상의하여 자택(문향헌)에 학교를 설립하여 이름을 창명이라 하였다. 永續常設(영원토록 이어가며 언제나 이용할 수 있도록 함)하고자 하였으나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유감이다. 형은 중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가산은 탕진되어 부득이 고향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김한영은 “유족들이 선대로부터 들어온 말에 의하면 현 죽향초등학교 터는 범재공의 집안에서 목화밭으로 경영하던 것을 아낌 없이 기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해방 후 개교기념일에 학교 당국(교장 전병석)이 감사의 표시로 은수저 한 벌을 선물한 사실을 범재공의 손자인 김한영․치영 형제는 지금도 기억한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 등을 참고하면, 창명학교는 문향헌에서 진명학교란 교명으로 출발했지만, 정식인가를 받기 위해 창명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목화밭도 희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誠齋公行狀」, 『淸風金氏家乘』, 141-142면. 김상구, 『김규흥 평전』, 옥천군․옥천문화원․사)김규흥기념사업회, 2018, 32면 재인용.
정지용이 졸업한 옥천공립보통학교는 진명학교(1905)에서 창명학교(1909 설립)의 전신임에 무게가 실린다. 창명학교는 문헌상 자료에 1909년 설립인가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매일신보』(1906. 6. 28.)의 내용으로 보면 1909년보다 훨씬 전인 1906년 정도부터 창명학교라 불리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정지용은 1909년에 설립인가를 얻은 사립창명학교를 입학하여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듯 정지용은 사립창명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 김규흥이 1908년에 망명하였다는 소식을 유년시절에 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립창명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사립창명학교는 그 기능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옥천공립보통학교로 교명마저 바뀌는 혼란을 겪게 된다. 그리고 옥천군수가 학교의 교장 직까지 겸임하게 되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역사적 사실 앞에, 정지용이라는 어린 소년이 무심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경험. 그 경험은 나라를 잃은 불안증이 되었을 것이고, 학교라는 공간에서조차도 정지용을 혼란스럽게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