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에 남는 사진이 있다.
정지용과 시문학 동인이 두 줄로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다. 정지용은 양복을 입고 뒷줄 오른쪽에 뒷짐을 지고 서 있다. 김영랑은 앞줄 왼쪽에 한복을 입고 앉아있다. 그는 강진에서 작품만 올려보내다가 한복 차림으로 상경하여 사진을 찍은 것이다. 박용철은 뒷줄 가운데에 껑충 서 있다.
이들은 한국 문학사를 존재시키는 역량 있는 자들로 정지용, 박용철, 이하윤, 김영랑, 정인보, 변영로이다. 이들은 『시문학』에 이름을 올리며 나란히 문단 활동을 한다.
『시문학』 창간 시절인 1930년, 용아 박용철이 중외일보사 편집국으로 이하윤을 방문한다. 이하윤은 이때를 1930년 “가을의 어느 날, 옥천동 우거에서 정지용을 만나 시문학 동인지 발간을 계획”(「해외문학시대」, 『한국문단이면사』, 깊은샘, 1983, 169면)하였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시문학』 창간호는 1930년 3월에 발간되었다. 그리하여 “가을의 어느 날”이란 이 부분은 오류가 있을 것으로 사료 된다.
정지용은 교토 동지사여전 출신이란 인연으로 중외일보 기자였던 김말봉을 찾아가며 이하윤을 만난다. 이후 이하윤은 『시문학』에 관련된다.
『시문학』의 인쇄, 조판 등 일체의 경비를 담당하였던 박용철은 눈물겨운 일화(이효민, 「한국문단측면사」, 위의 책, 36면)를 남긴다. 그는 이산이 감옥에 있을 때, 생활비를 보조하였다.
이산이 중동학교 교원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은연중에 민족주의를 불어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 일본 형사의 아들이 있었다. 형사의 아들은 밀고를 하였고, 이산은 입건이 되어 법정에 섰다. 이산은 민족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부정하지 않았다.
경제적 능력과 무관하게 불우한 이웃은 항상 있는 법이다. 일제 강점기를 힘겹게 감내하며 살았던 박용철을 보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화두 하나를 던져주고 떠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지용이 “시약씨 야, 네 살빗 도 / 익을 ᄯᅢ로 익엇 구나. // 젓가슴 과 북그럼성 이 / 익을 ᄯᅢ로 익엇 구나. // 시약씨 야, 순하디 순하여 다오. / 암사심 처럼 ᄯᅱ여 다녀 보아라. //” - 「Dahlia」 중에서(『시문학』, 시문학사, 1930, 15-16면)라고 노래할 때, 박용철은 “나 두 야 간다 / 나의 이 젊은 나이를 / 눈물로야 보낼거냐 / 나 두 야 가련다 //” - 「ᄯᅥ나가는 배」 중에서(『시문학』, 시문학사, 1930, 22면)라며 큰소리로 절규한다.
순수시인이라 일컬어졌던 정지용이나 인정 있게 문단계를 주름 잡던 박용철도 갔다. 그들은 『시문학』에서 권력과 직접 대결을 피하며 순수문학을 지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렇게 역사나 권력과 대결하기도 하고, 권력지향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하며, 권력과 직접 대결을 피하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그들처럼 때로 아름답고 순수하게, 때론 슬프고 차갑게 살면서 역사의 한 장면을 완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