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이병기와 정지용의 인연은 가람이 시조집을 발간하면서부터 더욱 돈독해진 것으로 보인다.
정지용은 1940년 「가람시조집에」라는 평론을 삼천리 134호에 최초로 싣는다(후에 산문에 재수록). 그는 “청기와로 지붕을 이우고 파아란 하늘과 시새움을 하며 살았으며 골고루 갖춘 값진 자기에 담기는 맛진 음식이 철철히 남달랐으리라 생각된”다며 “세기에 부조된 시조 시인의 자세는 고봉(高峯)과 같이 수려하고, 면앙정(俛仰亭)•송강(松江)•진이(眞伊) 같은 이들! 당대수일(當代隨一)의 가람 같은 이!”(산문, 동지사, 1949, 263-264면)라고 적고 있다.
이는 정지용이 가사 문학의 대가였던 송강 정철과 자신이 영일 정씨 자손으로 인척 관계였음을 인지하였거나, 송강의 작품에 경외심을 가졌었던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또 가람 이병기 작품의 강경하고 전통적이고 참신한 시조 예술에 대한 추켜세움의 일면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황진이도 거론한 것으로 보아 정지용이 황진이의 시조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가람시조집 발(跋)」에 “송강 이후 가람이 솟아오른 것”이라며 가람의 시조는 “완벽”하다고 말한다. 글자 하나도 비뚤게 놓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정지용이고 보면 가람의 시조가 마음에 꽉 들어찬 모양이다.
시조를 사적(史的)으로 추구한 이, 이론으로 분석한 이, 비평에 기준을 세운 정녕(丁寧)한 주석가(註釋家)요 계몽적으로 보급시킨 이가 바로 가람이다.
시조 제작에 있어서 양과 질로 써 가람의 오른편에 앉을 이가 아즉 없다. (중략)
마침내 시조틀이 시인을 만나서 시인한테로 돌아오게 되었다. 비로서 감성의 섬세와 신경의 예리와 관조의 총혜를 갖춘 천성의 시인을 만나서 시조가 제 소리를 낳게 된 것이니 가람시조가 성공한 것은 시인 가람으로서 성공한 것이라 결론을 빨리하면 시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던들 아이예 시조 한 수 쯤이야……하는 부당한 자신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산문, 같은 책, 265-269면) - 당시 정서를 그대로 전하기 위하여 대부분 원문의 표기법에 따랐으며, 꼭 필요한 한자는 ( )안에 병기하고, 대부분의 한자는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한글로 바꾸었다(필자 주).
“가람의 오른편에 앉을 이가 아즉 없”다는 정지용의 이러한 거론은 전통 언어 예술인 시조의 기원과 발육을 기대한 서술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일본 유학 시절, 조선에는 돌아갈 문예사조나 시적 갈래가 없다고 고민한 흔적에서 엿볼 수 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