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이용원, 더 멋있게 더 예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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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이용원, 더 멋있게 더 예쁘게
  • 김용환 기자
  • 승인 2022.10.13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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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고 봉사하는 배정복 원장
55년 이용 외길을 걸어 오는 배정복 원장이 손님의 머리를 손질해 주고 있다.
55년 이용 외길을 걸어 오는 배정복 원장이 손님의 머리를 손질해 주고 있다.

품격 있는 서비스로 고객만족에 최선

옥천읍에 심플한 간판을 내건 중앙이용원(원장 배종복, 75). 1968년 면허를 취득, 55년째 이용원을 운영하고 있는 배종복 원장. 옥천이 고향인 배 원장의 이발소 벽에는 사각거리는 가위소리만큼이나 각종 표창장으로 빼곡하다. 특히 명절이면 저녁 11시 30분까지 가위를 놀려야할만큼 그의 실력은 정평이 나있다. 

어른이 된 남자들의 어릴 적 동심이 묻어나는 시골 동네 어귀 조그맣고 낡은 이발소. 거기엔 부모 손에 이끌려와 눈물 콧물 닦아내며 아무리 소리쳐 울어도 눈 한 번 꿈쩍이지 않고 머리를 밀어 내던 이발사 아저씨의 가위 손이 있었다. 그러한 모습을 흐믓하게 바라보던 야속한 아버지, 할아버지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아랑곳없이 동네 이야기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이발소 안은 웃음소리와 남자들만의 수다(?)로 요란했다. 

남자들만의 수다공간

이렇듯 이발소는 흐트러진 용모를 단정히 하고 스타일 다듬는 공간이며 남자들만의 사랑방이었다. 그러던 곳이 세월이 변하면서 남자들도 미용실을 찾게 되어 어려움에 몰리고 있다. 

배 원장 역시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여러차례 옮겼다. 배 원장은 어렸을 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도 못가고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다. 그래서 기술을 배워야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용업에 뛰어 들었다. 그때 나이 열여덟.

7남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냈다

아버지가 해병대 제대 후 사업을 하다 눈을 다치는 바람에 가장 아닌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여러번 장소를 옮기며 이발 일을 시작해 지금 의 자리로 옮겼다. 배 씨는 한창 전성기 때는 옥천에 이발소가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40여 개 밖에 안 남았다며 “전성기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할 수 있었고 돈도 많이 벌었지”라고 했다. “이 나이에 그래도 이 만큼 일할 수 있는 건 기술이 있기 때문이”라며 “손기술로 7남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냈다”고 밝게 웃는다.

이발소엔 세월을 간직한 가죽의자 등이 50여 년의 세월을 말해준다. 이발 기구며 가구, 거울 등 모든 물품이 주인장의 손때 묻은 세월을 그대로 드러낸다. 지나간 세월만큼 젊은 층이 이발소를 찾는 발길도 뜸해 “지금은 손님이 옛날만큼 없다”며 “그래도 가끔씩 찾아주는 손님이 있어 소일거리로 하고 있다”고 했다. 가끔씩 찾는 손님들과 옛 추억을 서로 나눌 때가 즐겁다고 했다. 주변에서 그 나이에 안경도 안 쓰고 손도 안 떨린다고 부러워한다며 무엇보다도 나이 들어 소일거리를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고 했다.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그 자리를 지켜낸다는 자체가 역사다. 지금은 오히려 일하기가 수월하다는 배 원장은 새마을지도자, 영농회장, 이용원지부장, 이장으로 봉사도 많이 했다. 특히 이장을 역임할 때 옥천읍에 노인정이 없어 노인들에게 편히 쉴 곳을 네군데 어렵게 만들어 어르신들을 즐겁게 해준 기억이 새롭다고 했다. 

“요즘엔 노년을 즐기며 손자 크는 재미로 산다”며 열심히 일하고 봉사로 열심히 살겠다고 자부하는 배 원장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건, 건강과 화목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중앙이용원 전경
중앙이용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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