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서 상중리 능골에 묘소
통정대부 형조참의 이징(李澂)의 자는 자구(子久)이며 본관은 황해도 재령 이씨(載寧李氏)이다. 그의 증조부는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이맹현(李孟賢)이며 조선의 이씨 왕조 외손이다.
이징 참의는 당시 옥천군 군서면 서화리이며 현재 옥천군 군서면 평곡리의 전의현감을 지냈낸 옥천군수의 딸과 결혼하여 살았다. 그는 제용감 봉사을 지낸 이은집(李殷集)의 아들이다.
1527년(중종 22년) 7월에 태어나서 25세인 1552년(명종 7년)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561년(명종 16년) 34세에 대과시험에 합격하였다. 처음 관직에 나가 교서관을 지냈고 감찰과 형조, 호조, 공조좌랑을 두루 역임하였다. 종6품인 성균관 전적과 직강을 했으며 이어 종부시 첨정, 내담시 부정,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과 당령을 지낸 후 형조참의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은퇴했다. 그 밖에 외직으로 전라도 도사, 평안도 어천 찰방을 지냈다.
1600년(선조 33년) 8월 27일에 이징 참의는 병으로 생을 마치니, 향년 74세였다. 그의 묘소는 옥천군 군서면(서화) 현재 상중리에 속한 동오리 능골에 장례를 모셨다.
부인 은진송씨(恩津宋氏)는 1538년(중종 33년) 생으로 83세인 1621년(광해군 13년)까지 장수하고 남편 이징 참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그의 아들 이용(李溶) 진사는 2남 1녀를 두었고 장남은 이장생이다.
이징 관련 상소문-『고암선생유고』
정립 선생의 『고암선생유고』집에는 “참의 이징 관련 상소문”을 대필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수록되어 있다.
“향속(鄕俗)에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 중에는 후한 것이 있고 박한 것이 있습니다. 후한 것은 선행이 있는 것이고, 박한 것은 악행이 따른 것입니다. 박악한 픙속은 간혹 한 고을의 수치가 됩니다. 그 수치를 말살하려 한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통렬하게 그 뿌리를 제거하여서 인순(답습)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수치가 한 사람에게 있으면 온 고을이 모두 그 수치를 함께 당하게 됩니다.
군서 서화리(西華里)의 고(故) 참의 이 공은 대대로 우리 고을에서 살았는데 왕손 가의 외손 후예로서 문호가 저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참의의 시대에 이르러 첨지공(僉知公)과 함께 형제가 있었는데 화애를 서로 나누고, 인목이 아울러 돈독했습니다. 관직은 기대에 미쳤고, 제사에는 예를 다했습니다. 고을 사람 중에 지우(智愚)를 막론하고 누가 이 형제가 존경스럽고 사랑할 만 사람임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이 형제는 본처의 아들이 없으니, 이미 천도의 불가지(不可知)가 극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불행한 것은 참의공에게 측실의 아들 이우남(李友男) 한 사람이 있는데 지금 50세로 여전히 자녀가 없습니다. 이는 그 후사를 끊는 것입니다. 천도가 참의 집안에 은혜를 베풀지 않음이 너무 심합니다. 선인에게 복을 내리고 음인(淫人)에게 화를 내린다는 이치 아득하고 어두운 데에 있어서 꾸짖을 수 없는 것이 심합니다. 한 고을 사람으로서 이 참의공의 남긴 한 고아를 보면 오히려 읍 안의 서원이나 좌주의 자식보다 못합니다. 이 때문에 한 고을의 인사가 참의공 집안에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다. 하늘의 뜻과 비교하면 또한 10배로 심합니다.
동당시험 이징 서자 이우남께
역서 맡겨 답안지 빼기는 일하게 함
금년 봄에 문의현 동당시(東堂試) 과거시험에 이우남(李友男)을 구박하여 답안지를 옮겨 쓰는 역서(易書) 담당자로 삼았습니다. 역서라는 것은 한때의 천한 직임입니다. 한두 글자의 잘못된 글씨나 빠진 글씨가 있으면 매질을 반드시 가합니다. 하루 안에 죄를 범한 숫자를 계산하지 않고 범하면 반드시 매질을 합니다. 이 때문에 역서라는 직임은 그 고통과 욕됨이 천한 것입니다. 처음에 이 직임을 반드시 이우남에게 맡기려 한 것은 문관의 자식이기 때문에 문필이 반드시 남보다 우수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까? 이는 문관 당상관의 자식인데 직위가 높은 집안의 소생이 먼저 매질의 굴욕을 받아야 합니까? ~<중략>~
조선초 대과급제, 곽은, 전평령, 이징 뿐
우리 옥천 고을의 대과에 합격한 당상관은 옛날부터 많지 않았고 문관은 더욱 드물었습니다. 단연코 백 년 전후로 말씀드리면 중종 때 단지 곽 승지(곽은)가 있었고, 명종 때에는 단지 전상주(전팽령)가 있었고, 선조 조에는 단지 이 참의(이징)가 있을 뿐입니다. 그 태어남이 드물어서 사람들이 귀하게 여김이 깊고, 그 귀함이 깊으니, 세상에서 숭상하여 오래 전합니다. 이른바 숙향(叔向)의 어짊은 오히려 10세로써 용서받는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참의공은 1600년(선조 33년)에 죽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34년이 되었습니다. 고을 사람들의 존경과 사모함이 없어지지 않았고, 유가에서 사랑하고 공경함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은 고아는 그 침탈과 포악함을 이길 수 없어서 스스로 향임으로 먼저 나갔습니다. 향임의 임무에 스스로 임한 것은 시골 풍속의 후박의 구분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참의공이 이미 죽은 후로 말씀드리면 만호 이호(李灝)와 진사 이용(李溶) 형제는 세상에 있을 때, 참의 집안에서 의지한 바 있습니다.
이우남이 비록 용렬하다고 할지라도 역서(易書)가 되는 모욕에 응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는 세상의 정세가 길게 탄식할 만한 것입니다. 나는 이우남 한 사람에 대하여 참된 의사가 정답다하여 이처럼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습니다. 이우남은 역서로서 이로부터 전례에 따라 5월 옥천군 본읍의 시험에 와서 간혹 거듭 미치는 모욕이 있습니다. 우리 고을의 경박한 풍속이 더욱 심한 구역으로 들어가서 결코 구원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처럼 자세히 진술하오니, 여러분께서 깊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