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보낸 동영상에 토끼가 젖을 먹이며 새끼를 키우는 게 있다. 그걸 보고 토끼의 진한 모성애에 놀랐다. 난 토끼라면 순하고 겁만 많은 영리하지 못한 동물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공원같이 보이는 곳 바로 길가 잔디밭에 굴을 파고 새끼를 낳고선 젖 줄 때가 되어 굴속 새끼를 불러내 젖을 먹이고 있다. 집토끼인지라 옆에 사람이 많아도 조금도 신경 안 쓰고 새끼 젖을 먹인다. 거기까진 뭐 별 신기할 게 없다. 한데 놀랄 일은 그 다음이다. 새끼 일곱 마리 젖을 다 먹이곤 새끼들이 굴속으로 다시 들어가길 기다리더니 굴 입구를 앞발을 이용해서 흙으로 막는데 사람 같다.
흙을 끌어 모아 입구를 덮곤 앞발로 콩콩 눌러 다진다. 그리곤 또 흙을 끌어모아 그 위에 덮고 앞발로 다지길 반복해 나중엔 전체가 평평해서 어디가 굴 입구 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누가 위로 지나가도 발밑에 토끼새끼들이 있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감쪽같다. 그런 작업을 하는 어미 토끼를 보니 살도 빠지고 털에도 윤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초췌해 자식 키우며 삶에 지친 우리들 엄마의 모습이다. 집토끼인지라 사람이 구경을 해도 조금도 경계하는 빛도 없이 작업을 계속한다.
굴 입구라는 표지판을 세운 것도 아니고 다시 젖을 먹이려면 어떻게 입구를 찾는지 모르겠다.그 작업을 보고 있으니 정말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자식사랑은 한낱 미물이라고 다를 게 없다. 모성애에 있어선 새끼 낳는 것들이 똑같다. 오히려 인간보다 더 진한 것 같다. 저 토끼가 집토끼여서 사람들이 바싹 붙어서 구경을 해도 조금도 개의치 않지만 이 토끼가 무서워하는 건 다른 동물이다. 야생고양이다.
우리 어릴 땐 산에 산토끼 천지였다. 하여간 조그만 야산이라도 지나가면 길가 풀숲에 숨었다가 후다닥 달아나는 산토끼를 수없이 본다. 하도 흔하니 뭐 그러려니 하고 지나간다. 그러던 산토끼가 씨가 말랐다. 그게 야생고양이가 많아져서 그렇단다. 토끼의 천적이 고양이다.
한참 전에 여기에 대해서도 글을 쓴 적이 있지만 그때 산에 가서 고양이가 토끼새끼를 해치는것을 직접 목격했다. 고양이가 임도에서 나를 보고 도망을 가는데 가서 보니 산토끼 새끼가 죽어 있었다. 수십 년 만에 산토끼를 처음 보는 순간인데 그것도 고양이가 제 먹이로 해치는걸 직접 목격한 것이다. 아마 어른 토끼라면 고양이에게 쉽게 잡히진 않았을 거다. 그런데 육식동물인 고양이가 저리 토끼새끼를 다 해치니 멸종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모성애, 이 모성애처럼 숭고한 게 어디 있으랴. 목숨까지 거는 게 모성이다. 한데 토끼보다 못한 모성애를 가진 사람도 많다. 한동안 부모에게 죽임을 당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사회의 공분을 산 일이 있었다. 자기에게 걸림돌이 되는 아이를 학대 하다가 죽게 만드는 일이 우리를 분노케 한다. 자식이야 하찮은 미물도 낳는다. 옛날부터 낳은 부모보다 키운 부모 은혜가 크다 하지 않았는가.
새나 동물이 평소엔 사람만 보면 도망가기 바쁘지만 일단 새끼를 낳으면 돌변한다. 꿩이나 작은 새들이 봄에 알을 품을 때는 사람이 곁에 가도 잘 안 날아가고 달아나도 주변에서 맴돈다. 사람이 따라가면 조금 기다가 멈추고 또 곁에 가면 조금 기어 달아나고 하기를 반복하는데 그게 해치려는 다른 동물을 제 새끼에게서 멀리 떼어놓기 위한 거라고 한다.
산에 가면 멧돼지가 무섭다. 멧돼지는 원래 육식동물이 아니어서 포악한 성질이 없으니 사람을 보면 미리 숨지만 새끼달린 어미멧돼지는 사람에게 덤벼들어 해친다고 한다. 멧돼지가 공격하면 사람으로선 속수무책이다. 옛날 시골엔 집집마다 소가 다 있었다. 성깔이 있는 수소보단 온순한 암소가 다루기가 쉬워 암소를 먹이는데 이 순한 암소도 새끼를 낳으면 돌변한다. 어른들에게는 그렇게 못하지만 아이들은 곁에만 오면 뿔로 받아 아주 조심해야 한다.
난 아이들이 새끼 난 암소에게 접근했다가 뿔에 받혀 몸에 멍이들고 어른들이 혼비백산하는걸 몇 번 보았다. 부모는 자식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냥 건강해서 저희들 잘 살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저희들 잘 살면 부모가 행복한 것이고 자식이 행복해 하면 부모가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