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청백리와 효자의 아이콘
1459년(세조 5년)에 출생하여 1547년(명종 2년)까지 88세에 생을 마쳐 장수하였다. 본관은 신평 송씨(新平宋氏)이고 자는 흠지(欽之)이며 호는 지지당(知止堂), 관수정(觀水亭)이고 시호는 효헌공(孝憲公)이다. 1510년(중종 5년)에 잠시 옥천군수를 지냈다.
세조 때 호남의 삼계현(전남 장성 옛지명)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관직에 있을 때는 7번이나 ‘청백리’에 선정되는 등 청렴하였다. 송흠 덕분에 할아버지 송처은은 경상도 문경의 유곡찰방이었고 후에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친 조가원(趙可元)은 문소전 참봉으로 우찬성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하동 정씨이며 생원인 정필주의 딸이다.
31세 문과 급제, 벼슬 나가
송흠은 1459년(세조 5년)에 태어나 1480년(성종 11년) 21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2년(성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과 승문원서 관직을 맡았다. 연산군 때에는 관직을 버리고 후진들을 가르치고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사서오경의 경서를 강론하였다. 1502년(연산군 8년)에 상을 당해 물러나 있다가 남원교수에 제수되었다. 중종반정 이후에는 홍문관 정자로 소환되어 저작과 박사, 수찬, 사간원 정언, 헌납, 병조정랑, 전라도사, 사헌부지평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보성군수와 옥천군수를 지내고 순천부사, 여산군수를 연임하고 또 내직으로 사헌부장령, 제시(諸寺)의 정(正), 의정부 사인을 거쳤다. 1524년(중종 19년)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에 올라서 전주 부윤에 제수되었고 광주와 나주목사로 자리를 옮겼다. 1528년(중종 23년)에 승정원 도승지로 승진하고 또 1529년(중종 24년)에는 외직으로 나가 담양 부사가 되었다. 1532년(중종 27년)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다가 장흥부사로 자리를 옮겼다.
제일 청백리 목민관이자, 만고효자
1534년(중종 29년) 전라감사를 제수받고, 이때 모친 연세가 99세였고 그는 77세로 왕에게 상소를 올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모셨는데, 어머니는 103세까지 장수하였다. 1538년(중종 33년) 청백리(淸白吏)에 뽑혔고 한성부 좌윤을 제수받았다. 이어 특별히 정2품 자헌대부에 승진되어서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제수되었고 임금의 윤허로 물러나니, 1541년(중종 3년) 특별히 의정부 우참찬을 제수받았다. 1543년(중종 38년)에 종1품 숭정대부에 올라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에 제수되었다.
7번 청백리 선임
이때 전남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 관수정에서 4백m 떨어진 곳에 송인수 전라도관찰사가 ‘기영정(耆英亭)’이란 정자를 건립해 주었다. 1547년(명종 2년) 11월에 8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송흠은 관직에 있을 때 외직으로 나가서 선정을 베푼다는 소문이 여러 번 중종에게 보고되었고, 내직에 들어와서 정성을 다해 중종에게 간언하여 문무백관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청렴결백하고 아주 신중하게 공무를 봉행하였기 때문에 7번 청백리(淸白吏)로 선임되었고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장성 고향 관수정, 청백리 상징
부인은 하음 봉씨로 감찰인 봉인(奉寅)의 딸이다. 그녀는 1461년(세조 7년) 태어나 1539년(중종 34년)에 78세에 생을 마쳤다. 자녀는 4남 1녀로 장남 송익침은 병조참의에 추증되었고 차남 송익경은 낙안현령을 역임하였다. 삼남 송익순은 참봉을 지냈고 딸은 생원 정종호에게 시집갔다. 전남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 관수정은 청백리의 상징인 송흠 선생의 정자로 ‘전남 문화재자료 100호’이다.
역마 3필만 타고 수령 부임, 삼마태수
일화에는 송흠이 홍문관에 있을 때, 최부가 송흠이 역말을 사사로이 탄 것을 조정에 아뢰어 파면된 적이 있었다. 송흠은 최부의 경계를 받아들여 나중에 지방 수령으로 부임할 때 말(馬)을 세 필로 제한하여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렸다 한다. 한편, 송흠이 여산군수(礪山郡守)로 있을 때 특별한 방법으로 술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호산춘(壺山春)’이라고 하였다. 송흠이 개발한 ‘호산춘’은 여산의 전통주로서 조선의 4대 명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