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수를 역임한 정동협 옥천군수는 1738년에 태어나서 1796년까지 산 조선 후기 충북 음성군 출신의 문신이다. 그의 옥천군수 재임 시기는 1783년부터 1788년까지 비교적 긴 5년 동안 재임하고 중앙직과 주로 외직을 담당하고 당상관에 올랐다.
그의 세거지는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마산리이며 본관은 동래 정씨(東萊鄭氏)이고 자는 사고(士皐)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냈던 정석오(鄭錫五)이며 부친은 정양순(鄭養淳)으로 군수를 지냈다. 정동협 군수의 할아버지 정석오(鄭錫五, 1692년 ~ 1749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다. 영의정 정광필과 좌의정 정유길, 좌의정 정창연, 영의정 정태화의 후손이며 자는 유호(攸好)이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할아버지 정석오 좌의정
정동협 군수의 조부 정간공(貞簡公) 정석오(鄭錫五)는 1691년(숙종 17년)에 태어나서 1748년(영조 24년)까지 산 조선 후기 문신이다. 그는 숙종 때인 1715년(숙종 4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정자, 검열, 문학, 수찬을 지냈다.
1721년(경종 1년) 지평으로 있을 때 김일경(金一鏡) 등과 더불어 소론 계열로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을 탄핵하는 등 신임사화를 주도하였으나, 1725년 영조 즉위하고 노론이 득세하자 관직에서 삭출당했다. 2년 후인 1727년(영조 3년)에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고자 노론을 파면하고 이광좌, 조태억을 기용해 정승으로 삼아 소론을 참여시킨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세자시강원사서로 다시 기용된 뒤, 강화유수와 도승지로 부제조를 겸한 뒤 동지의금부사, 한성부좌윤, 도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여 종2품 호조참판, 이조참판,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승승장구, 호조판서 좌의정 올라
이후 한성부우윤, 대사헌, 이조참판, 도승지를 지내다가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이조참판, 대사간, 호조참판, 도승지를 역임하고 경기도 관찰사를 거친 후 정2품 병조판서, 우참찬,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우참찬, 예조판서를 하며 약방제조를 겸하며, 예조판서, 좌참찬을 하며 지경연사를 겸한다.
그리고 다음에 우참찬, 판의금부사를 거쳐 지경연사로 있다가 병조판서가 되고 이후 판의금부사,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호조판서를 거쳐 이후 우의정이 되고 연이어 좌의정까지 올랐다. 이후 1748년 영돈녕부사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가 되어 효현황후(孝賢皇后) 시호를 황제께 올리고 매년 바치는 공물을 진헌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가던 중 병사하였다.
주로 외직 옥천군수, 진주목사까지
정동협 군수는 1768년(영조 44년)에 음직 즉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공으로 벼슬에 진출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음식 등 대궐 음식을 담당하였던 사옹원 봉사가 된 이후 장흥 고직장과 의영고 주부를 거쳐 1775년(영조 51년)에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 그리고 2년 뒤에 궁중의 가마나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 판관이 되었다.
이어서 지방 외직으로 남평현감과 옥천군수를 역임하고 1785년(정조 9년)에 부평부사, 풍덕군수, 울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1792년(정조 16년)에는 당상관 정3품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1796년(정조 20년)에 58세로 생을 마쳤다.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마산리에 있으며, 할아버지 정석오와 아버지 정양순의 묘도 같은 묘역에 있다.
동래 정씨(東萊鄭氏) 시조 정지원의 22세손 효자 정한철(鄭漢澈)이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에 살다가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야동 마을로 와 거주하였으며, 25세손 진주목사 정동협(鄭東協)이 음성군 맹동면 마산리에 와서 처음 세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