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이 최고 보배… 최저임금 없는 직장 만들어
연매출 ‘230억’… 매년 연구비로 3% 이상 투자
김병국(59) (주)교동식품 대표는 하루 300km씩 이동하며 영업을 한다. 대학시절엔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했던 그는 1992년 대전에서 유통업을 시작한 뒤 옥천에서 식품 제조업으로 사업을 확장해 어느덧 26년째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연매출이 220억 원을 넘지만 그의 도전은 지금도 쉼 없이 진행되고 있다. 미래 식품시장의 선도주자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 김 대표의 기업스토리를 들어본다.<편집자주>
▲좋은 상품 욕심, 제조업으로 이어져
김 대표는 젊은 시절 민주화 운동 청년단체에 오랜 기간 몸담았다. 그후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다 결혼 이후에야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교동식품의 오늘을 있게 만든 것은 1992년 대전에서 시작한 식품 유통업이다.
김 대표는 “유통업에 종사하던 당시, 돼지 가격이 오르자 가격 경쟁력을 위해 품질을 낮추는 납품 업체들을 보며 안타까웠다”며 “그 때 소비자에게 질 좋고 맛 좋은 식품을 내가 직접 제공해보자는 욕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가 제조업에 진출하게 된 계기다. 김 대표는 당시 식품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했지만 유통업을 하면서 알게 된 조리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가 처음 판매한 상품은 양념돼지갈비였다. 김 대표는 “브랜드 육을 가지고 돼지갈비를 만들었다. 상품의 질이 좋아 청년사업가 임에도 신뢰가 생기고 제품의 인기도 높았다.”고 말했다. 이후 소갈비로 까지 사업을 확장한 그는 “소갈비를 만들고 나니 자투리 고기가 생겨 이를 활용해 냉면육수를 만들었다.”며 “교동식품의 시작은 돼지갈비, 소갈비, 냉면육수, 이 3가지”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제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더 넓은 부지를 찾아 1998년 옥천군으로 오게 됐다.
▲ 자금-품질관리서 디자인까지
김 대표는 ‘매일 처음 가는 길을 걷는 기분’이라고 기업을 운영하는 부담감을 표현했다. 그는 “사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남이 안가는 길을 가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따라 갈 수도 없고, 배워야 할 것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이는 끊임없는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 대표는 교동식품을 운영하면서 하루 300km씩 이동하며 홍보와 영업에 매진했다. 젊은 나이에 큰 돈 없이 사업을 시작해 최소한의 인력으로 기업을 꾸려야 했던 그는 자본관리, 품질관리는 물론 영업과 상품 디자인까지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김 대표는 “탑차를 끌고 전국 광역시와 작은 시골마을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동했다”며 “운전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 배를 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정도였다. 땅을 밟는 시간보다 운전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말했다.
교동식품이 제품을 수출하는 여러 국가들도 모두 김 대표가 직접 방문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꼼꼼한 기업 운영 덕분에 CJ, 한성 등 국내 굴지의 식품 회사에도 다양한 상품을 납품하고 있다.
김씨는 “국내 식품 대기업들도 교동식품의 실력과 기술력을 인정하고 있다. 교동식품은 매출 감소 없이 계속해서 성장한 기업”이라며 “끊임없는 노력이 가져온 결과”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지금도 40만km를 달린 개인용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
▲ 미국, 캐나다 등 해외수출
김 대표는 기존 식품 시장과 차별화된 시스템을 개척하면서 경쟁력을 확보했다. 조리가 필요 없이 가열만 하면 되는 식품을 내놓은 것이다. 이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찾는 시대적 요구와 맞아떨어졌다. 식당에서도 추가로 조리원이 투입될 필요가 없어 큰 환영을 받았다.
김 대표는 “원료를 구입해 조리를 해서 외식업체에 재판매 하는 구조”라며 “기존 시장과 다른 개념의 상품을 제공하니 경쟁력이 있었다. 상온에서 1년 이상 식품을 보관할 수 있는 기술들을 연구하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고 말했다.
교동식품 제품은 전국 40여 곳의 대리점을 통해 식당으로 납품되고 있다. 미국, 캐나다, 일본, 홍콩 등 해외 시장도 계속 넓혀가고 있다.
시장 개척과 함께 식품 연구에도 소홀함이 없다. 230억 원의 매출에서 3%정도를 연구에 재투자한다. 식품연구원과 품질관리원 등 총 10명이 한 달에 2~3가지의 신상품을 내놓는다.
김 대표는 “계절에 따라 선호 식품이 달라지고, 워낙 소비자 입맛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교통식품 제품은 미국 FTA와 중국 CNCA(국가인증인가감독관리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일본에선 검열을 면제받고 있다. 김 대표는 “중국 CNCA를 통과한 곳은 전국에 5곳 밖에 없으며 교동식품 외엔 모두 대기업”이라며 “믿을 수 있는 제품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 근로자 피와 땀으로 기업 성장
김 대표는 기업 운영에선 근로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사업은 이윤도 남겨야 하지만 현장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한다”며 “그 사람들의 노력이 농축돼서 기업이 운영되는 것이다. 한 회사는 개인의 역량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섞여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동식품의 정직원 120여 명 중에는 최저임금을 받는 직원이 한명도 없다. 5년 이상 장기 근로자에게는 해외 연수 기회도 주고 있다.
김 대표는 “조직 관리에 금전적인 부분이 빠질 수 없다. 지나친 노동력 착취는 애사심을 떨어뜨린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젠 물량도 증가하고 안정기에 접어든 만큼 근로자들을 더 배려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옥천군의 향토기업으로서 지역을 위한 제품도 연구 중이라고 밝혔다. 옻 특구지역을 활용한 옻계탕, 옻 닭볶음탕은 이미 개발됐다. 김 대표는 지역농민들의 소득증대에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 직원들에게 따로 “큰 포부 가져라”
김 대표는 ‘교동식품은 26년간 한 해도 성장이 멈춘 적 없는 회사’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지속적인 성장의 동력을 “꾸준한 노력, 그리고 작은 일에서도 배우는 자세”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과거 유통업에 종사할 때 납품업체의 부도로 피해를 입었던 경험을 언급하며 웃음을 지었다. 당시 김 대표는 납품 비용을 받을 방법이 없자 직접 부도회사로 찾아가 부도 업자와 함께 파출소까지 갔다. 그러나 ‘돈 벌면 갚겠다’는 말만 믿고 각서도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김 대표는 “그런데 정말로 2년 뒤에 연락이 왔더라”며 “그분은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해 남들에게 속아 부도를 맞았다. 다시 일어나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신문 구독을 잘 받아오는 사람, 외상값을 잘 받아내는 사람, 시식코너에서 상품을 잘 판매하는 사람 모두에게 배울 점이 있다. 모든 일에 배움과 깨달음이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직원들도 큰 포부를 갖길 바란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개발자라면 본인이 한식의 세계화에 힘쓰고 있다는 긍지를, 품질관리원이라면 소비자 안전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며 “각자의 역할에 큰 비전을 갖고 있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소 본인의 소신에 대해서도 밝혔다.
김 대표는 “고시생들을 보면 2~3년간 많은 것을 포기하고 공부를 한 덕분에 합격 이후 평생 그 일을 하면서 산다. 그런데 사회에는 일회성에 그치는 안일한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이 많다”며 “나도 남들만큼만 일했다면 지금의 교동식품은 없을 것이다. 젊은 시절 항상 어깨에 돼지갈비를 이고 다녔지만 지금은 남들을 위해 고민하는 자리에 왔다. 욕심을 버리고 3년만 집중하면 향후 30년을 지켜갈 수 있다”고 말했다.
▲ 신개념 멀티 식품사 추진
김 대표는 이미 개척한 시장 시스템 외에 다양한 사업구상이 있음을 밝혔다. 단순히 식품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외식사업 창업자에겐 지역상권 분석, 개인에겐 적합한 메뉴를 추천해주는 신개념 멀티 식품제조회사를 꿈꾸고 있다.
김 대표는 “교동식품이 한식 외식산업에 터미널이 되길 바란다. 하지만 기업을 키우는 것은 개인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들의 필요에 의해서 성장할 뿐”이라며 “최대한 그 필요에 부합해 미래 식품회사의 모범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