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 봄기운이 화사하다 못해 초여름 날씨를 보였던 어느 오후 소정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육지 속의 섬’ 막지리로 들어갔다.
옥천으로 옮겨온 지 8개월. ‘입성’ 전의 옥천은 남쪽 여행길이면 으레 들르던 빼어난 경관의 금강휴게소가 있는 곳, 초등학교 적 친구인 벗이 보고 싶어 가끔 방문했던 소박한 동네, 정지용 시인으로 인한 문향과 사는 이들의 순박함이 어우러진 평온한 도시였다.
청주에서 문의면을 지나면 갈 수 있는 대청호가 옥천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저 가을 경관이 빼어난 청남대를 찾아 계절을 만끽했고 바다가 없는 육지의 낙도 충북사람이기에 틈만 나면 대청호 전망대를 찾아 운치 있는 호수를 즐겼고 귀한 손님들이 오면 또다시 주변의 민물매운탕집을 찾아 시간을 보내고 맛을 즐겼다. 대청호는 그렇게 ‘속사정’을 알기 전에는 가까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는 나들이 장소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옥천은 ‘아픈 동네’로 다가왔다. 대청호는 옥천에겐, 옥천 주민에겐 ‘아픔’ 그 자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막지리도 그중 하나다.
120가구 750여 명이 모여 살던 마을 대부분이 대청호 물 아래 잠기면서 지금은 25가구 29명의 어르신들만이 살고 있다. 그냥 ‘살고 있는’ 게 아니라 행복한 마을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대청댐을 다시 부숴 흙으로 채워 넣고 옛 마을을 복원시킬 수 없는 바에야’ 눈만 뜨면 보이는 대청호를 언제까지고 원망만 하며 살 수는 없는 이유에서다.
40여 년 외지생활을 청산하고 요양 차 돌아온 고향 마을에서 오히려 몸이 더 아프다는 손호연 이장은 “코앞이 물천지인데 석회질이 많아 식수로 쓰지도 못하고 하물며 우리 마을에 상수도 관정이 설치될 계획은 2030년 안에는 없다고 한다”며 “산중턱에 있는 지하수 물탱크 용량이라도 늘려주기만을 바라고 있다”고 했다. 계절 가릴 것 없이 가뭄만 오면 먹을 물이 부족해 군 생산 ‘꿈엔~水’로 대처하고 있는 현실이 서글프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작 마을 주민들을 아프게 하는 건 따로 있다고 했다. 바로 ‘사람들’이다.
소정리에서 배로 5분 거리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도 제일 먼저 만난 건 화려한 의상의 낚시꾼이었다. 천연덕스럽게 중국에서 왔다고 너스레를 떨던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쓰레기만이 남았다. 30여 명 규모의 의료봉사단이 오겠다는 전화도 걸려왔다. 사람 스무 명 사는 동네에 30명 의사가 무슨 소용이냐는 손 이장의 얼굴이 어둡다. 생색내고 이력 쌓기 위한 ‘그들만의 기념사진’ 들러리 제의에 마음이 자꾸 닫힌다고 했다. 지역의 언론사나 서울 방송사의 취재도 달갑지 않단다. 간절한 요구는 귀뜸으로 듣고 물에 잠겨 스러져가는 마을에 대한 호기심과 재미거리로만 보도가 된다는 것.
비단 막지리 주민만의 이야기는 아닐 게다.
내게는 하찮은 일이 누군가에겐 인생을 바꿀 소중한 일이 되기도 하고, 내겐 오락의 대상일 뿐인 어떤 것이 누군가의 삶 속에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가 전신을 옥죄이기도 한다.
사려 깊은 신중함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아픔을 가슴으로 안아주는 관용과 배려가 절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