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の蒲團は重い」(「일본의 이불은 무겁다」).
다소 생경하겠지만, 식민지 지식인의 애끓는 비애를 적은 정지용의 산문이다. 그는 1926년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잡지 『自由詩人』 4호에 「日本の蒲團は重い」를 발표한다.
당시 정지용은 한국어로 식민지 지식인의 비애나 조선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노래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원고를 원하는 곳에 메일로 보낼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우편으로 보내는 것도 상황이 여의치는 않았으리라.
즉 당시 정지용의 작품 활동 여건을 충족시키는 잡지가 만만치 않았으리라는 생각이다.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도 글은 쓰여지고 발표되고 읽혀지고 있었다. 일제 말기 상황보다 1926년 문단상황은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하더라도 정지용의 일본 유학시절(그가 일본에서 정식시인으로 인정받기 이전), 그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시간들이 지났으리라. 이는 「日本の蒲團は重い」에서도 쉽게 짐작해낼 수 있다.
정지용은 기타하라 하쿠슈가 주관한 『근대풍경』 1월호에 「海」를 실었다. 이후 기성시인 대우를 받게 된다. 여러 이견이 따르겠지만(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1927년을 정지용이 일본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시점으로 잡을 수 있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1927년을 그의 문학을 일본에서 인정받은 시점으로 보기로 한다.
한편, 정지용은 일본인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표시 나게 고발하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또 그의 비애를 형언할 수 없는 환경에 있었다. 그랬을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어로 「日本の蒲團は重い」고 쓰고 있다. 그것도 “せんちめんたるなひとりしゃべり”(센티멘탈한 혼잣말)이라는 표제와 함께 발표한다. 이는 정지용의 식민지 지식인의 비애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은 아니었을까? 애써 “せんちめんたるなひとりしゃべり”라며 ‘혼잣말’이라는 위로를 한 것은 아니었는지. 애타게 조선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압천을 홀로 걸어 하숙집으로 향하였을 정지용의 모습이 그려진다. 슬프다.
似合はぬキモノを身につけ 下手な日本語をしやべる自分が た之きれなく㵉しぃ。(중략) 朝鮮の空は何時も ほがちで美しぃ。朝鮮の子のこフろも ほがらかで美しくぁる筈だ。 やフもすれば曇りがな このフろが呪はしぃ。追放民の種であるこそ雜草のやうな根强さを持たねぼならなぃ。何處へ植えつしゖて美し朝鮮風の花を咲かねばならなぃ。自分の必には恐らく ぃろぃろの心が ぃつしよになつてゐるだらう。(중략) 破れた障子の紙が 針のやう冷ぃ風に ピコルルル 夜中の小唄をうたひ出す。蒲團の奧まぢもぐりこんで縮まる。 ……日本の蒲團は重い。(『自由詩人』4호, 1926. 4, 22면. 최동호 엮음, 『정지용전집2』, 서정시학』, 2015, 314-315면 재인용.)
정지용은 “어울리지 않는 기모노를 몸에 걸치고 서툰 일본어를 말하는 내가 참을 수 없이 쓸쓸하”다고 고백한다. “조선의 하늘은 언제나 쾌청하고 아름답고 조선 아이의 마음도 쾌활하고 아름다울 것이지만 걸핏하면 흐려”지는 정지용의 마음이 원망스럽단다. “추방민의 종이기 때문에 잡초처럼 꿋꿋함을 지니지 않으면 안”되는 정지용. “어느 곳에 심겨지더라도 아름다운 조선풍의 꽃을 피우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어찌 “안”되었던 이들이 정지용만 이었겠는가? 당시 조선인의 대부분이 지닌 공통된 정서였겠지……. 정지용은 “마음에는 필시 여러 가지 마음이 어우러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심란한 그의 마음이 엿보인다. “찢어진 창호지가 바늘 같은 차가운 바람에 휭휭 밤중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불 깊숙이 파고들어 움츠러든다. ……일본의 이불은 무겁”단다.
정지용은 일본이 가하는 압력의 하중을 이불의 무게에 비유하며 무게중심을 이동하고 있다. 이는 식민지 지식인의 극심한 비애를 견디려는 일종의 노력으로 보인다. 이렇게 정지용의 민족적 고뇌의 확산은 안으로 서늘히 굳어져 축소되어 이동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이불로 파고들어 움츠러들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의 이불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는 그의 고백적 산문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2019년 4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일요일.
「日本の蒲團は重い」를 공부하는데 도움주신 박세용 교수님, 둘째 오빠, 김다린 선생님, 『옥천문화』 편집위원장님과 제자 조희유에게도 고마움과 안부를 전한다.
4년 전 최동호 교수님께서 하사하신 책을 항상 옆에 두고 교과서처럼 참고한다. 교수님의 큰 연구업적에 고마움을 느낀다. 필자도 후학들에게 미천하나마 도움이 되는 학자로 남기를 소망해보는 하루가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