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覆字)로 표기되었던 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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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覆字)로 표기되었던 정지용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9.06.07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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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1988년 3월 31일.

정지용이 월북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날이다. 그리고 납북 시인이라는 사실상의 명찰을 달고 정지용 작품이 해금됐다. 김기림의 작품과 함께 해금되었다는 말이다. 두 시인 모두 사상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순수문학의 본령을 지키기가 힘들었다.

진실은 영원히 묻혀지지 않는다. 

정지용은 납북이라고 잠정결론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저작들은 해금되어 본격적으로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인쇄물에서 내용을 밝히지 않으려고 일부러 비운 자리에 ‘○, ×’따위로 표를 찍어 복자(覆字)로 표기되었던 정지용. 한국문학사에 정지용은 그렇게 어색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신상성(용인대 명예교수·소설가)은 『주간문학신문』 403호(2019. 5. 29, 8면) 「미당과의 문학적 인연」에서“‘북에는 정지용, 남에는 서정주’”라는 발언을 하고 있다. 안타깝다. 진실과 사실의 거리에서 필자는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역사는 그런 것인가 보다. 본질은 가끔씩 빛을 잃고, 숨기도 하고 숨겨지기도 하는 것인가 보다. 이런 경우가 매우 안타깝지만 필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 진실은 항상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기에 안도의 숨을 내쉴 뿐이다. 그것이 다소 시간이 오래 걸릴 때 답답하긴 하다.

그래도 기다린다. 오래 기다리면 언젠가는 진실이 사실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지용의 해금처럼.

이 날, 정지용과 김기림이 해금된 날은 역사에 기록된 날이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살린 이들의 작품이 반세기만에 다시 빛을 본 날이다. 

기쁘다.

우선, 정지용의 해금과 관련된 이야기를 쓰면서 그의 해금을 위하여 노력해 주셨던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당시 상황은 현재보다도 훨씬 녹록치 않았음을 짐작하게 된다. 정치 상황이나 사회 분위기가 납북 혹은 월북설이 나돌던 한 사람의 작가를 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것.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성(姓)이 바뀐 혼란과 비슷한 혼동을 가져올 수도 있게 하기 때문이다.

정지용의 해금을 추진하였던 사람들은 때론 신변의 안전과 주변의 따가운 눈치도 살펴야 하는 경우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하여야 하는 일이고 해내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지용과 그의 작품들이 우리 곁에 머물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현재 한국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일본어, 독일어(졸고, 「정지용의 「湖水」 소고(小考)」, 『국어문학』 제57집, 국어문학회, 2014, 122~125면.), 영어로 번역되어 세계로 나아가 세계인들의 품에 안기고 있다.

여러 가지 언어 형태와 다양한 언어 체계를 통해 작품을 구사하였던 정지용은 많은 이들에게 의구심(疑懼心)을 갖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덕분에 정지용을 연구하는 연구자들도 많아졌다. 그 연구자들이 할 이야기도 그만큼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수백의 연구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아직까지 연구할 가치가 여전히 존재하기에 정지용 연구에 매달리는 학자들이 부지기수이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정지용의 작품세계 연구를, 여기서는 문학연구자들의 몫이라 차치(且置)해 두자. 정지용의 삶과 관련, 그는 6·25 이후 생사가 불분명하였다. 생사가 불분명한 이후 그의 작품은 금서가 되었다. 이렇게 금서가 되었던 정지용의 작품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다음에서 정지용과 금서들이 해금되기까지의 과정과 ‘지용제’에 대하여 미력하나마 가만가만 되짚어 보고자 한다. 해금과 관련된 상당수의 자료는 깊은샘 박현숙 사장의 제공이 있었음을 밝힌다. 그동안 소중히 자료를 모아온 노고와 제공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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