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가 괴정 오상규 선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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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가 괴정 오상규 선생 (2)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4.05.3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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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후 한북흥학회 설립

괴정 오상규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근대 여명기에 함경도 출신 선각자들과 함께 애국교육계몽단체인 한북흥학회를 1906년 10월에 창립하였다.
오상규 선생은 한북흥학회 회장을 맡았고 이준 열사와 보성전문학교 이사이며 이용익 군부대신의 손자인 이종호, 유진호 선생 등과 함께 함경도를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며 지역의 학교설립을 지원하여 개교하도록 하였다. 학교설립운동 등 교육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을 통해 오상규 선생은 이같이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에 앞장선 선각자이자, 애국지사이다.

■한북, 서우학회 통합 서북학회 설립

특히 함경도에서 활발히 학교설립운동, 계몽강연회 등으로 함경도 사람에게 교육계몽의 중심이었던 한북흥학회와 그리고 평안도, 황해도의 교육 계몽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 1908년 통합한 서북학회 회장으로 오상규 선생은 이준 열사와 박은식 후에 상해임시정부 2대 대통령, 도산 안창호,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 이동휘, 독립운동가 이종호, 독립운동가인 이갑과 유동렬 선생과 함께 국민교육 계몽운동 추진에 많은 후원금을 냈고 또한 적극적인 활약을 하였다. 그리고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흥사단의 재정 후원을 실질적으로 전담하였다. 애국지사 오상규 선생은 대한자강회 회원으로도 활약을 한 대한제국 시대 애국계몽운동의 큰 지도자였다.

■함경도 회령 명문가 출신

오상규(吳相奎) 선생은 두만강 강변의 국경도시인 함경도 회령의 명문가인 해주 오씨 가문은 대대로 벼슬길에 오른 사대부 집안으로 그는 조선 후기인 1858년(철종 9년)에 태어났다. 그의 호는 홰화나무가 있는 회령의 고향 이름을 따서 괴정(槐庭)이라 하였고 자는 경노(景魯)이고 본관은 해주 오씨이다. 중국에서 대개 훌륭한 선비가 이 마을에 살거나 관청이 있는 곳에 홰화나무를 심었다 한다. 옥천구읍 상계리의 ‘계’자는 원래 옥천군의 관청은 군청이 있어 홰화나무 ‘계(계)자’를 썼다가 계수나무 계(桂)자로 바꾼 예가 있다. 오상규 선생의 호가 고향마을의 상징인 홰화나무에서 따왔기 때문에 예부터 이 마을 해주오씨 가문은 훌륭한 선비를 배출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의 선조인 오성식(吳聖植)은 관북 출신으로 호서판서에 오르고 증조부 오책량은 관직에 나가 전주 관찰사 휘하에 영장을 하였다. 할아버지 오종찬은 규장각 제학 지냈고 아버지는 오명준(吳明濬)이며 어머니는 정선 전씨이다. 외조부는 판서 급 관직에 오른 김경제이며 부인은 파평 윤씨 윤동근의 딸이다. 오상규 선생은 파평 윤씨와 사이에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고 한양의 부호였던 장남 오중묵과 차남 오윤묵, 법률가인 사위 이윤재를 두었다. 오상규 국장은 경술국치 한일합병 직후 서울에서 옥천(沃川) 구읍으로 이사와 문정리 한옥(현재 아리랑 식당)에 살았다.

■입암 선생께 성리학 수학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배운 것은 복습하고 문리(文理)를 거칠게라도 이해하였다. 일찍이 집안의 일가인 삼종 매곡공과 족숙 인계공으로부터 사서삼경 7서의 공맹자의 유학을 공부하였고 18세에 유학자인 입암 전공(全公) 문하에서 사서삼경과 경서를 배우면서 주자의 주자학적인 성리학을 배웠다.

■병조판서 조영하 천거로 선전관

그 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서울에 상경하였는데, 병조판서 조영하가 오상규 선생을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무관직에 천거하여 6품 선전관이 되었다. 1886년(고종 23년) 29세에 안무영에서 공사를 감독한 공으로 통정대부의 반열에 올라 오위장을 지냈다. 이어 두만강 강기슭의 함경도 가을파지첨절제사로 나갔다가 중앙 내직으로 옮겨 기사장에 되었다.

■철도국장 때 경인선 건설, 출납국장

다음에 다시 탁지부 사세국장이 되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조정에서 복잡한 일이 생겨 관직 생활에 기복이 있었으나, 휴가를 얻어 아버지의 장례를 함경도 안변(安邊) 석동에 치렀다.
후에 다시 장시관, 사법관이 되었고 농상공부의 참서관을 거쳐 철도국장으로 경인선을 건설했고 평리원 판사, 검사 겸 재판관을 거쳐 탁지부 출납국장이 되었다. 1905년 49세에 가의대부가 되어 종2품 직인 황제비서실인 시종원 부경(副卿)이 되었고 이어서 강화군수를 마지막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 전후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함경도의 한북흥학회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를 총괄하는 애국교육 계몽단체인 서북학회 회장으로 그 당시 오상규 선생은 관북과 관서, 해서지방의 대표적인 우국지사들과 함께 애국교육운동을 적극 펼친 애국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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