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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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
  • 손수자 수필가
  • 승인 2024.05.3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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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도 숲과 계곡을 찾아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조용하던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다. 친지들을 맞이하고 노내느라 여념이 없다.

넉넉하지 않은 공간에서 복닥거리노라면 불편함이 있지만, 모처럼 만난 지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즐겁기만 하다. 때로는 친지를 따라온 낯선 손님을 맞이하기도 한다. 낯선 사람도 숲속을 함께 거닐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오랜 지기처럼 스스럼없는 관계가 된다. 그 부부가 그러했다. 자연이 맺어주는 인간관계는 순수하기 때문이리라.

더위가 한풀 꺽인 여름. 60대 중반쯤 된 듯한 낯선 부부가 남편의 친구 부부를 따라 우리 집에 왔다. 차에서 내린 부부는 서로 손을 다정하게 잡고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낀 듬직한 체격이고 그의 아내는 상냥했다. 우리 부부도 손님을 반갑게 맞아 뜰 안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집안으로 들기 전에 집 주위부터 둘러보았다. 우리 집에 처음 오는 사람은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다. 아직도 돌멩이가 나뒹굴고 잡초가 어수선한 뜰이 부끄러운데 손님들은 흙냄새를 맡을 수 있는 마당이 있어 좋기만 하단다.

뜰을 구경한 일행이 마당 가에 서서 계곡을 내려다보더니 물가로 내려갔다. 선글라스를 낀 낯선 남자는 베란다에 서서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 돌계단을 내려가기 불편한 몸인가 싶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서 계곡으로 천천히 내려갈 것을 권하자 빙그레 웃으며 그냥 서 있는 게 좋다며 사양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시각장애인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계곡에서 올라온 손님을 집안으로 안내하고 차를 대접하면서 비로소 그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시력을 잃게 되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신경을 쓰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대기업의 중역으로 있다가 작은 기업체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IMF가 그분이라고 비껴가지 않았다. 회사가 부도를 맞고, 빚에 쪼들리면서 건강도 나빠졌다. 갑자기 앞이 잘 안 보여 안과를 찾았을 때는 급성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햇다.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쳤다고 했단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계곡이 좋다고 자랑삼아 말했던 내가 오히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차를 마신후 모두 숲으로 들어갔다. 지팡이 대신 아내의 손을 잡고 숲속 길을 걷는 그를 시각장애인이라고 여길 사람은 없을 듯했다.

다정한 부부일 뿐이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이르자 그가 아내와 함께 소나무를 안아보고 숲 체험장 평상에 앉아 얼굴을 하늘로 향하기도 했다. 주변 풍경에 대해 소곤소곤 설명해 주는 아내의 말에 귀 기울이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는 귀담아들은 풍경을 마음속에 스케치하고 물감을 입히면서 풍경화를 완성하는 듯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 부부의 모습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따뜻해졌다.

임도를 걸어 들미골 칡소에 이르렀다. 작은 폭포가 있는 풍경이 정겨운 곳이다. 나는 우리 집에 오는 손님을 이곳까지 안내하며 자랑하곤 한다.

숲과 어우러진 폭포가 시원스러운 물소리로 일행을 맞이했다. 바위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흰 물줄기와 아담한 물웅덩이, 그리고 금강 소나무가 어울린 아름다운 경치가 탄성을 자아냈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폭포 물소리를 들으며 가슴속 한을 이곳에 모두 토해버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의 뒷모습이 내게 무겁게 다가오면서 연민을 자아냈다.

폭포를 뒤로하고 낯선 부부와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조잘거리는 물소리에 감동하고 간간이 지저귀는 새소리에 즐거워했다. 솔바람이 실어다 주는 숲의 향기에 취한다고 했다. 상기된 표정으로 자기가 그린 마음속 풍경을 말하기도 했다. 물소리로 계곡의 깊이와 물의 양을 가늠하고, 코에 스치는 향기로 나무와 풀꽃을 이야기했다. 볼 수 없는 눈으로 환히 보는 듯 주변 환경을 말하는 그의 묘사력이 놀라웠다. 그는 마음의 눈으로 생생하게 보며 느끼고 있었다.

감나무 밑에 모깃불을 피우고 모두 둘러앉았다. 바비큐 그릴에 고기를 구우며 밤이 깊도록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서로 공감했다. 예기치 않게 닥친 절망스러운 삶을 희망적인 삶으로 전환한 부부의 노력은 진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 무엇보다도 시각장애 남편과 의기소침한 자녀들을 다독거리며 살림을 꾸려온 그의 아내가 존경스러웠다. 일거수일투족 남편의 눈이 되고 손발이 되어 온 부인은 오로지 남편이 건강하기만을 바랐다. 앞을 못 보면서도 아내를 지긋이 챙기는 노신사! 노부부의 곱고 깊은 사랑이 부럽기도 했다.

다음날, 그들이 차창을 열고 손을 흔들면서 떠났다. 그 모습이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 부부도 손 흔들어 배웅했다. 그들이 남기고 가는 감동의 여운이 길게 꼬리를 물었다.
낯설었던 노부부가 마음의 눈으로 무엇이든 볼 수 있음을 알게 했다. 볼 수 있는 눈으로도 못보고 깨닫지 못하는 게 얼마나 많은지도 일러주었다. 비로소 맑은 영혼을 지닌 마음의 눈이 더 소중한 눈임을 깨달았다. 나는 무엇을 더 잘 보려고 안경을 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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