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에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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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길을 잃다
  • 박미련 작가
  • 승인 2024.06.07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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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덩이 하나가 누르고 있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다. 긴 숨을 몰아쉬어 보지만 여전히 납덩이는 무게를 더하고 있다. 혼자 있을 때면 통증은 두 배가 된다. 생각하는 회로를 부숴버리고 싶지만,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진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덩굴처럼 달려 나온다.잠자리에 들 때가 더 문제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감각이란 감각은 죄다 살아 요동을 친다. 밤은 절망의 시간이다. 골치 아픈 일들이 먼저와 똬리를 틀고 앉았다. 비관적인 생각이 꿈틀거리고 슬픔이 밀려온다. 잠을 청하려 애를 쓰지만, 소용이 없다. 전날보다 더 몸을 혹사했으나 말짱 도루묵이다. 오늘도 간절한 단잠의 꿈은 산산조각이 난다. 오십은 살아갈 날이 부담스러워지는 배반의 지점이다. 엄마 몫을 다하느라 앞만 보고 달렸다. 나만 바라보는 눈들은 갓길을 용인하지 않았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세운 그들이 하나둘 떠나고 몸에 익은 습관은 갈 길을 잃었다. 시간은 남아돌아 의미 없이 흐르고 자유로워진 몸은 구들장만 찾는다. 그제야 듣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가 확성기를 틀어놓은 듯 선명하게 들린다. 어긋나 괴로워하는 몸의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고단 했던 자신을 알아달라 보채는 건가. 수평의 편안함을 누리기도 전에 황량한 세월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살아보지 않은 날들이 불행이란 꼬리표를 달고 바짝 조여 앉는다. 몸이 버석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산을 찾는 버릇이 있다. 계룡산의 도덕봉, 계족산의 봉황정, 식장산 독수리봉, 덕유산 향적봉을 차례로 다녀왔다. 오늘도 대둔산 태고사를 찾았다. 산에 오를 때는 쥐스킨트 소설의 주인공 좀머 씨가 된다. 좀머씨처럼 걷지 않으면 몸이 점점 굳어버릴까 봐 차오르는 숨을 참아가며 걷고 걷는다. 힘들어도 도리가 없다. 주르르 흐르는 땀방울을 훔치며 고개를 넘으니 순탄한 평지가 펼쳐진다. 바퀴를 단 것처럼 가만히 있어도 쭉쭉 내달린다. 지형에 따라 같은 행위가 눈에 겨운 즐거움이 된다는 사실이 놀랍다.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간질인다. 너럭바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단잠에 빠지고 싶다. 오르막길의 헐떡거림은 이미 기억에 없다. 다리는 솜털처럼 가벼워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잠시나마 내 인생도 훈풍에 돛단 듯 순순히 떠다닐 것 같다. 등산의 짜릿함은 순간의 유희인가. 내리막길에서 만난 훈풍은 어디에도 없다. 나의 현재는 여전히 오르막길에 있다. 매서운 추위에 몸도 마음도 얼어붙었다. 가파른 길, 차이는 돌부리와 불거져 나온 잔뿌리가 앞길을 막는다. 샛길이 만만해 보여 방향을 틀어 보지만 그곳도 만만찮다. 쉽게 갈 줄 알았더니 이번에는 시간을 제물로 요구한다. 이번 고비만 넘으면 고지일 것 같아, 일껏 달려왔더니 안식은 더 멀리 꽁무니를 뺀다. 거처도 불안하고 어쭙잖은 자식 농사도 모호한 데칼코마니 같다. 성과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린다. 이 곳만 지나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려나. 산다는 것은 우물을 얻기 위해 바위산을 삽질하는 것만큼이나 고단하다. 글쓰기만큼은 긴 세월 진지하였는데 내게 남은 게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 본 적은 있는지. 조지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산문에서 그가 쓰는 이유로 네가지를 들었다.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이 그것이다. 오웰은 정치적 목적을 미학적 열정으로 승화시키고자 글을 쓴다고 했다. 난 왜 쓰는가. 아직도 순전한 이기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두렵다. 모피코트를 둘러도 한기가 가시지 않는 것처럼 내 글밭은 황량한 겨울이다. 피안의 세계로 점점 움츠러들면서도 글쓰기의 날을 벼릴 일인지 모르겠다. 정성을 쏟았던 많은 일이 무의미해진다. 최후의 보루. 그나마 자존심을 지켜준 글쓰기조차 의미 없는 일이 되면 어쩌나. 글쓰기에 대한 자부심이 무너지는 육체를 어루만져주면 좋으련만 이것도 꿈처럼 아득하다. 오십을 넘어서니 서서히 끝이 보인다. 반짝이는 꿈을 좇느라 끝이 있는 줄 몰랐다. 영원할 줄 알았던 삶의 배반을 서서히 몸으로 체득하는 지점이 오십 대가 아닌가 싶다.누군가 이 모든 부정적인 생각이 성급한 판단이라 말해주면 좋겠다. 아직 다가올 다른 오늘이 솜털처럼 많은데 어제와 다른 오늘에 절망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순간을 연인처럼 맞으라고 등 떠미는 이 없을까. 톨스토이는 오늘 행복하기 위해 죽음을 기억할 일이라 했다. 삶이 유한한 것은 절망할 일이 아니라 희망을 주는 조건이 됨을 설파한 그처럼 이 순간을 사랑하리라. 행복은 순간에 깃드는 담담한 고요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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