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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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오빠
  • 손수자 수필가
  • 승인 2024.06.0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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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입김을 내 뿜으며 싹둑싹둑 날선 전지 가위질을 하고 잇다. 잘린 배나무 잔가지들이 사다리 발밑으로 떨어진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물기 빠진 배처럼 배나무에 매달여 있는 큰오빠. 남은 걱 나눌 것도 없이 다 주워도 괜찮다던 큰오빠가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반긴다. 웃는 모습이 마치 안동 하회마을 양반 하회탈과 같다. 축 처진 눈초리가 세월만큼 깊어진 광대뼈 주름과 맞닿아 있다. 입춘을 건너온 햇살이 꼬들꼬들 무말랭이처럼 말라가는 한낮, 오빠의 얼굴에 넉넉한 미소가 배꽃처럼 화사하다.

키보다 꿈이 웃자라던 어린 시절, 오래되어서 기억이 시원치않지만 나와 11살 정도 차이가 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오빠가 가는 곳이라면 울면서 기를 쓰고 따라다녔다.

한번은 추운 겨울이었다. 동네에 큰 연못, 작은 연못이 있었다. 큰 연못에 스케이트를 타러 간다고 했다. 추워서 안 된다고 하는데도 따라나섰다. 나는 큰오빠 등에 업혀 신이 났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추워서 벌벌 떨고 있는데 큰오빠와 작은 오빠는 노는데 팔려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참다 참다 못해 “이제 그만 집에 가” 울며 아무리 불러도 나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때 뒤늦게 온 동네 오빠가 그 광경을 보고 소리 질러 오빠를 불러왔었을 때는, 내 얼굴은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두 볼은 빨갛다 못해 새파래져 있었다고 한다. 그때 기억인지 들은 기억인지는 잘 모르겠다. 

작은 오빠는 “형 엄마한테 이를 거여.”하며 형만 신나게 놀았다고 협박을 하곤 했다. 울다 지친 나는 춥다가 따뜻한 큰 오빠 듬직한 등에서 잠이 들었다.

조금 더 커서는 큰 신발을 좋아했나 보다. 구두, 운동화 할 것 없이 손님이든 누가 와서 신발을 벗어 두면, 몰래 살짝 그 신발을 신고 나와 골목을 끌고 다녔다. 혼이 나도 내 그 행각은 계속 되었다. 큰오빠 운동화를 신고 울며 벗어주지 않고 버텼다.

어머니께서는 생전 처음 운동화 앞부분에 하얀 줄이 들어간 빨간 운동화를 사오셨다. 그날 밤 빨간 운동화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던 옛 생각에 어느새 내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초등학교 3학년, 4학년에 아버지처럼 큰 태산 같았던 큰오빠가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에 입대를 했다.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큰오빠, 작은오빠, 언니, 남동생 오남매 가운데 넷째인 나는 아버지와 위로 작은오빠, 밑으로 남동생과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새삼 웃움이 난다. 주변에서 위아래 아들 사이에 여자아이가 영민해서 아들들의 기를 죽이고 친다고 했다. 작은오빠와 남동생과 나를 무엇이든 시키면 늘 내가 앞섰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발탁된 나는 큰오빠에게 편지 쓰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부르시면 받아 적고 하기를 석삼년 동안 편지 대필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귀찮고 아버지가 불러주시는 말들을 이해 못해 제대로 쓰지도 못했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어린 마음에도 하기 싫은 일보다 제대로 못 씌었기에 걱정이 앞서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도 그땐 편지 대필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글 쓰는 작업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또한 아무리 추운 엄동설한이라도 양치는 물론, 씻지 않고는 밤이 깊어도 잠을 재우지 않았던 아버지, 그때는 엄하고 늘 표정은 굳어 있었던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었다. 매일같이 숙제를 꼭 하게 했으며 일기 검사를 했다. 

그리고 쓰고 메모하는 습관을 생활화하게 한 것이, 나에게는 커다란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다가온다.

화살보다 더 빠은 세월에 큰오빠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은 배나무 잔가지 같다. 

그 가지들이 아프게 가슴을 찌른다. 언제나 질척이던 진흙땅처럼 녹록치 않았던 한 생이 맵찬 바람에 다시 등이 떠밀리고 있다. 

배나무에 매달린 경건한 일상이 햇살에 반짝인다. 큰오빠는 쪼그라든 어깨를 내밀고 남은 생을 가지치기하고 있다.

머지않아 보드라운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순백의 배꽃이 활짝 피어 산꼴짝을 하얗게 물들이면, 마음은 한없이 달이 뜨고 봄은 깊어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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