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커피와 원두커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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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커피와 원두커피(2)
  • 박미련
  • 승인 2024.07.0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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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살아움직이며 나에게 말을 걸어오던 손때 묻은 물건들도 허무하게 스러져 갔다. 좋은 일도 슬픈 일도 없는 세상. 나도 산다는게 그저 그런 것이려니 하고 주변을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잔뜩 취한 목소리로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려니 했지만, 그날따라 유독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 역시 친구의 투정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무슨 일이야? 별일 아니면 맑은 정신으로 얘기해.” 나의볼멘소리에 그녀는 파르르 떨고 있었다.

야속했던지 그녀는연신 전화를 걸어왔고 난 기어이 두 귀를 틀어막고 말았다. 한동안 멍하니 넋을 놓고 서 있는데, 서서히 그녀의 신세타령, 고독 타령은 모두 살아 있는 자들이 누리는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나도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다시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 나는 전화기를 들어 부서져라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나는 내게 지워진 십자가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친구는 갈수록 뜸해지는 남편의 목소리가 그리웠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 해주지 못하는 나를 원망했다. 그녀는 커피 대신 술을 찾는 것 같았다. 얼근하게 술이 오르면 그 후로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래, 신랑 잘 만나 행복하게 사니까 세상이 온통 네 것처럼 보이니 신랑 품이 참 포근한가 보지? 넌 처음부터 내 친구가 아니었어. 그래 좋아, 네가 원한다면 네 곁에서 이제 사라져주지.”친구의 술주정이 끝났나 생각하니 한편 홀가분해졌다. 갑상선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 뱃속에서 지금 한 아이가 불안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젠 그녀에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의 전화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난 마침내 화약처럼 폭발해 그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을 것이다. 말했더라면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던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차라리 떠나겠다는 친구가 오히려 고마웠다. 몇 달 뒤, 나는 기적같이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건강했다. 지워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5개월을 버텼더니 하늘이 안쓰럽게 여긴 모양이다. 아이를 낳은 지 한 달 만에, 수술하기 위해 입원했다.

수술 과정에서 부갑상선이 파괴되었다. 부갑상선은 우리 몸의 칼슘 대사를 조절한다는데 파괴의 결과는 끔찍했다. 입이 돌아가고 온몸이 뒤틀렸다. 가슴은 바윗덩이 같은 것이 짓누르고 있어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 어떤 말도 비뚤어진 입을 통과하지 못했다. 연이은 주사액의 도움으로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흐릿한 시야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들어왔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친구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창 너머엔 언제부턴지 빗줄기가 제법 큰 물보라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번진 눈화장이 야릇한 문양을 만들어갔다. “나쁜 계집애! 왜? 왜? 말하지 않았지?” 참고 있던 그녀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미안해, 내 십자가를 너에게까지 떠넘기고 싶진 않았어.” 난 그녀의 손을 꼬옥 끌어안았다. 다음 날도 그녀는 나에게 왔다. 그리고 기적처럼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얼굴에서 훅 끼쳐오는 커피 내음을 맡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깊고 그윽한 향기! 그것은 술 대신 다시 커피를 사랑하게 된 그녀의 삶을 대변하는 향기였다. 남편과의 이별이 끝나고 더불어 그녀의 고독도 끝났다는 사실을 난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갑상선암과 싸워 이겼다.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학교로, 유치원으로 두 아이를 보내고 나니 마음이 호젓하다. 이 시간에 그녀는 무엇을 할까? 살랑살랑 아, 그날처럼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아차, 미국은 지금 밤이겠지. 남편 곁에서 그녀도 달콤한 꿈을 꾸고 있겠지. 그녀가 보고 싶다. 또 그녀는 꿈속에서 나를 만나 싸우고 있을까? “커피는 원두가 제격이야.” “무슨 소리! 커피 한 숟갈에 설탕은 반쯤 그런 다음에 크림 두 숟갈을 넣은 아줌마 커피가 제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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