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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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지(2)
  • 박미련 작가
  • 승인 2024.07.1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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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친구도 얼마나 많은가?’ 그 예 그만 만나고 싶다는 단호한 결론에 이르고 만다. 홀로 폭풍과 맞서 싸우다 나온 사람처럼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런 후 친구를 본다. 말간 얼굴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나의 이런 옹졸함이 전해졌을까 봐 버럭 겁이 난다. 거친 심장박동이 그녀에게 닿아 나와 같은 결론을 내리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다행히 친구의 얼굴은 평온하다. 눈빛은 어느새 그곳에 가 있는 듯 촉촉하다. 혼자 소용돌이치던 시작도 끝도 없는 상념이 단번에 사라진다. 

단호한 결론이 어쨌단 말인가. 친구는 또 다른 나라고 하지 않던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십 대의 열정을,  아니 비탈진 경계에서도 함께여서 버텼는데 그것이 사라지는가. 고비마다 불쑥 찾아와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그날의 풍경이 이리도 선명한데 무얼 걱정하는가. 이내 심장은 잦아들고 어느 한적한 호숫가에 앉아 노닥거릴 때처럼 편안하게 그녀를 바라본다. 7월의 한낮은 온 땅을 달군다. 끈적끈적 들러붙는 습한 기운은 더욱 사람을 미치게 한다. 입맛까지 앗아간 된더위가 밉다. 

묵은지가 입맛을 돋울까. 몇 해 묵은 김장김치를 꺼낸다. 양념을 털어내고 들기름에 다글다글 볶아 파 마늘을 곁들여본다. 헉, 묵은지의 깊은 맛이 사라져버렸다. 신선함도 깊은 맛도 사라지고 기름만 입혀 겉만 번지르르하다. ‘이게 아닌데.’  거짓말처럼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두고두고 꺼내먹어도 질리지 않는 묵은지. 무시로 떠나는 그곳이 외롭지 않게, 대체 불가 묵은지 같은 친구는 모습 그대로 그곳에 아껴둬야겠다.

나를 바라보다

모처럼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 가족은 모이기만 하면 끝도 없는 토론의 장을 연다. 의견을 나누다 보면 때론 격론이 벌어지곤 하는데 그날은 자연스럽게 평창동계올림픽을 화제로 삼았다. 아들은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결성에 강하게 반발했다. 아무리 국가라도 무리한 추진이란다. 거대한 국가가 힘없는 개인에게 휘두르는 폭력이란다. 4년을 꼬박 땀 흘려 준비했는데 국가의 무례함에 꿈을 날려버리게 된 선수들이 참으로 억울할 일이라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일로 정부가 고초를 겪고 있다. 나라고 달리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단일팀 결성을 추진했을 것이다. 개인이 조금 희생하더라도 통일에 보탬이 되는 일이면 좌고우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념은 현실을 능히 이기고 확신에 차 의연히 나아갔을 것이다. “큰 그림을 봐야지. 물론 개인에게는 희생이지만 국익을 위해 당연히 양보하는 게 맞아.” 흥분하는 아들이 이기적인 것같아 평소의 생각을 거르지 않고 쏟아냈다. 국익 앞에서 개인의 희생은 통 큰 결단이다. 내가 없는 국가가 무슨 소용이란말인가.

그러나 아들 또한 만만치 않다. 평생 그들의 경제를 책임져줄 것도 아니면서 맘대로 전권을 휘두르는 건 옳지 않다고 말한다. 희생은 나를 내주는 것인데 그들에게만 요구하는 건 형평에도 맞지 않는 일이라고.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린 그들은 또 얼마의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는 일 아니겠냐며 아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억울해했다. 한발 물러나 생각하니 아들의 주장이 그럴듯하게 보인다. 내가 살아온 시대는 개인보다 나라가 먼저였다. 허술한 나라를 뒤로하고 나를 앞세우면 염치없는 일이었다. 양심이 먼저 발동하여 그릇된 일이라 아우성쳤다. 

이제 시대는 변했고 더 이상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나라가 튼튼해졌는데 여전히 나만 골동품 가게 주변을 서성이는 기분이다. 아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나도 어느새 기성세대가 아닌가. 내 시대에나 어울리는 낡은 가치관을 누구에게 강요하는가. 당연한 일이고 건강한 결과이지만 씁쓸했다. 용도폐기된 제품을 신줏단지 모시듯 살고 있으니 한심하기도 했다. 고루한 생각에 갇혀 있는 자신을 보니 이제야 이해되는 순간이 많다. 나도 내가 낯설어 당황한 적이 많은데 비로소 그 실체를 알 것 같다.

실존적 자아와 본질적 자아 사이의 틈이 하도 커서 나도 나를 몰랐다고나 할까. 며칠 전에도 그랬다. “당신 요즘 새로운 면을 본다니까. 의외로 보수적이야.” 딸애와 결혼관에 대해 티격태격하는 걸 보고 남편이 한 말이다. 결혼도 출산도 선택이라 말하는 젊은세대가 이기적이라 했더니 돌아온 남편의 반응이다. 마치 낡았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 같아 확 기분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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