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있기 때문인가
상태바
숲에 있기 때문인가
  • 손수자 수필가
  • 승인 2024.07.25 13: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은 나 혼자 숲으로 향했다. 건강을 위해 의무감에서 걷는 운동이 아니라 그냥 타박타박 걸었다. 아침부터 남편과 티격태격하고 나온 산책길이다. 숲으로 들어가려면 마음부터 열라고 했던가.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 양쪽에 쭉쭉 뻗은 금강소나무들이 나를 위해 도열한 듯 서 있다. 그 멋진 모습은 연병장의 사관생도들을 연상케한다. 가슴을 활짝 열어 그들을 맞는다. 솔향기가 가슴 깊이 스민다. 그 상큼한 향기에 울적한 기분이 가벼워진다.

숲 체험장에 들어섰다. 넓은 공간에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언제 보아도 미덥다. 양팔을 벌려 소나무를 감싸 안았다. 양팔의 손끝이 닿을락 말락 한다. 꺼칠꺼칠하고 딱딱한 감촉이지만, 소나무는 언제나 나를 편안하게 한다. 내가 기대고 있을 때까지 묵묵히 받아준다. 요즘은 누구에겐가 자꾸 기대고 싶다. 나이 들어가면 마음까지 연약해지는 걸까. 그동안 맞벌이 부부로 1인 몇 역을 하면서 억척스럽게 살아왔다. 남편에게 기대고 응석 부릴 겨를이 어디 있었던가. 웬만한 일은 스스로 판단하고 처리하지 않으면 수많은 일거리가 미해결 상태로 누적되어 갔을 뿐이었다. 시간이 여유로운 지금, 나도 남편에게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려 하지만, 주름살이 깊게 팬 그의 얼굴과 정년퇴직 후 처진 듯한 어깨를 바라보노라면 기대고 싶은 마음보다는 모성본능이 더 강하게 이는 걸 어쩌랴.

야영장의 낡은 평상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았다. 남편과 함께 올 때는 운동 삼아 걷는 빠른 걸음 때문에 그냥 스쳐 지나가서 누리지 못한 여유다. 어느 틈에 개미 한 마리가 내 손 등을 기어오른다.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가 생각난다. 개미는 부지런함의 대명사로 불리지만,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기에 요즘은 벌처럼 살아야 한다고 했던가. 벌은 이 꽃 저 꽃을 부지런히 옮겨 다니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서 꽃이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벌은 받은 만큼 돌려줄 줄 안다고나 할까. 지난 세월을 뒤돌아본다. 내 삶이 남에게 얼마나 유익했을까. 개미처럼 살지는 않았는지...

계곡에 걸쳐 있는 빨간 철제 구름다리 위에 섰다. 이 산촌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다. 햇빛이 계곡 깊은 곳까지 내려와 물속을 환히 밝힌다. 산천어인가 두어 마리가 분주하다. 형태로 보아서 지금이 저 녀석들의 산란기인가 보다.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 남편은 우리 집에서 이 다리까지 약 오십여 미터 구간은 자기의 양어장이라고 한다. 버들치 한 마리에도 눈빛이 달라지는 그, 잡기보다 기르는 양어장 주인이기를 주문해 본다.

다리를 건너 임도를 걸었다. 임도는 산불 예방 등 산림을 보살피러 다니기 위해 만든 자동차 길이다. 나에게는 고마운 산책길이기도 하다.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눈이 부시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향긋한 숲 냄새가 짙어진다. 맑은 공기와 청량한 물소리가 내 혼탁한 마음을 씻어주는 듯 싶다. 나무가 대사과정에서 방출하는 테르펜이라는 물질 그중에서 피톤치드라는 성분은 살균작용을 한다고 하지 않던가. 식물이 적의 침입에서 자기 몸을 방어하기 위해 내뿜는 살균 물질이 내 마음 안에서도 작용하는 걸까. 노여움이 누그러진다.

인적 없는 임도를 혼자 걷자니 멧돼지라도 나타날까 긴장이 된다. ‘그래, 오늘은 폭포까지만 걷자.’ 들미골 폭포로 가는 길 곳곳에서 산딸기가 나를 유혹한다. 비 온 뒤 알알이 물기를 머금고 있는 산딸기가 만지기만 해도 톡 터질 것만 같다. 새콤달콤한 맛! 입안에는 지레 침이 고인다. 조심스레 풀숲을 헤치고 산딸기를 하나씩 입에 따 넣었다. 풀 깊이 한 발 더 옮겨 산딸기 덩굴 가까이 가려다가 멈칫한다. ‘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 오빠는 말하지만...’ 라는 동요 가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치던 풍금 소리에 맞추어 제비처럼 입을 벌리며 노래하던 어린 제자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지금은 모두 어디서 무슨일을 하며 지내는지...

칡소가 내려다 보이는 넓적한 바위에 앉았다. 편안하다. 5미터쯤 되는 높이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시원스럽고 숲과 어울려 아름답다. 칡소는 수심이 깊기 때문인지 물 폭탄을 맞음에도 크게 요동치지 않는다. 물을 가두어 놓지 않고 한편으로 계속 흘려보낸다. 오늘의 나도 저래야 하지 않을까. 비운만큼 새것을 채울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아침에 남편과 있었던 언짢은 감정을 아직도 내 마음 안에 그대로 가두고 있다. 남편이 목조주택을 짓고 버려진 널빤지 조각 더미를 이웃 사람에게 땔감으로 몽땅 준 것에 내가 화를 낼 일이었는지... 내가 외출한 사이에 꽃밭 테두리를 하려고 애써 골라 놓은 것까지 주어 버린 나뭇조각이 그리도 소중했는지... 그게 아니었다. 내가 투덜거리자 그까짓 나뭇조각에 왜 그리 집착하느냐며 눈을 크게 뜨고 핀잔하는 그 표정이 그리도 섭섭했다. 전 같으면 침묵으로 응수하던 남편이 아니던가. 그렇다. 널빤지 조각이 뭐 그리 대수이랴, 그의 새로운 모습에 황당하여 내심 움찔하면서도 나도 질세라 언성을 높인 것이다. 남편의 눈초리만 올라가도 눈물이 핑 돌아 할 말을 입안 가득 머금고만 있던 나, 나 또한 변하지 않았는가. 영감 앞에서 두 눈 부릅뜨고 제법 큰소리를 치는 걸 보면...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수를 바라보며 우렁찬 물소리를 듣노라니 체중이 내려간 듯 가슴속이 시원하다. 내 마음의 물꼬가 이제야 트이나보다. 되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산새소리, 계곡의 물소리가 정겹다. 숲이 전보다도 훨씬 가까이 다가온다. 소나무,굴참나무, 서어나무, 층층나무 등 키 큰 나무들은 다른 종과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나뭇가지가 서로 기대거나 얹혀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서로서로 배려하며 비어있는 공간으로 가지를 뺃어가고 있다. 이 길을 자주 걸으면서도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숲만 보고 나무는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누군가가 ‘숲은 인간을 인간이 되게 만드는 텅 빈 관계의 그물로 충만해 있다’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숲에 살면서 텅 빈 관계의 그물 한 코가 되고 싶은 나. 숲에서 배우고 숲처럼 살아야 하리라.

웬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더니 부녀회장이 스쿠터를 타고 산모롱이를 돌아 나타났다. 외딴집 정 선생 댁에 가는 길이란다. 그녀는 “오늘은 왜 따로따로 운동 나왔어요? 선생님은 저 아래에서 올라오시던데.”라고 전해 주고는 사라진다. 혼자 숲에 간 아내가 염려되었을 남편의 마음이 읽어진다. 괜히 마음이 찡해온다. 내가 숲에 있기 때문인가.

(문장중 ‘칡소’는 강원도 양양 어성진 계곡에 있는 땅바닦이 둘러빠지고 물이 깊게 된 곳을 의미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