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편 논문과 유고문집 남겨
△ 육지수 교수의 생애
육지수(1907~1967)는 경제지리학자·교육자, 본관은 옥천, 호는 석전이다. 일본 제8 고등학교를 거쳐 1933년 동경제국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동경대학의 잠사경제연구실 조수로 근무했고, 1936년부터 8·15광복 때까지 연희전문학교 교수, 경성대학교 예과 강사, 평양사범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교수,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거쳐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1958년 문리과 대학에 지리학과를 창설하여 별세할 때까지 교수로 부임했다. 경제학과 출신으로 경제지리학과 인구문제 연구에 주력했다. ‘경제지리학’, ‘통계학 개론’ 등의 저서가 있다. 또 20여 편의 논문과 단문 등을 모은 ‘석전육지수교수유고문집’을 남겼다. 학회 활동으로는 대한지리학회 창설회원으로 부회장을 역임했고, 1960년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또한 서울대학교 신문연구소장·인구문제연구소장·금융통화위원·중앙경제심의회 위원·도시계획위원회 위원·중앙통계위원회 위원 등 폭넓은 사회 활동을 했다. 육지수 교수는 1967년 6월 27일 북아현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묘소는 옥천읍 교동 뒷산 선영에 있다. 그해 10월에 ‘석전 육지수 교수 추념문집’을 간행했다. 육지수 교수는 충북 옥천이 고향으로 경제지리학자· 교육자라 평가받고 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사촌오빠이기도 하다.
△ 평가
육지수는 한국 경제학계의 선두주자 계열로 평가받는다. 또한 지리학계에서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그는 1945년 9월 11일 노도양, 김종원과 대한지리학회를 창립한다. 이는 1996년 건설교통부 산하 법인으로 등록된다. 지리학 및 지리교육에 관한 학술적 연구와 회원 상호 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지리학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노도양, 육지수, 김종원 등이 중심이 되어 1945년 9월 11일 서울시 수송동의 중동학교에서 창립된다. 창립 당시 ‘조선지리학회’였으나 1949년 11월 총회에서 현재의 ‘대한지리학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그 뒤 대학에 지리학과가 설치되면서 학술지의 발간 등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 1947년 4월 첫 연구발표회가 있은 이래로 매년 2회 연구 발표를 행해 왔다. 그 내용은 주로 지리학 일반에 관한 것과 지리교육에 관한 것이었다. 1963년 학회지로 ‘지리학’을 창간한 이래 매년 1회씩 발간하다가 1974년부터는 연 2회씩 발간하던 것이 2009년 현재는 연 4회로 44권 4호까지 발간하고 있다. 그 밖에 주로 지리교육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한 ‘지리학회보’도 발간했다. 1980년부터는 건설부 국토지리정보원의 협조로 ‘한국지지’ 편찬사업에 착수해 총론편 1권, 지방편 4권 등 5권을 편찬했다. 별권으로 ‘한국지명요람’을 발간했으며 계속 증보·출간하고 있다. 충북 옥천이 고향인 육지수 교수는 현대 제1세대 선구적 경제지리학자이며 교육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 집필자-중원대학교 한국학과 이상주 교수
이상주 교수는 “괴산에서 향토사 연구 활동을 해오고 있다. 충북지역의 향토사에 관해 발굴 소개하다 보니 육지수 교수에 관해 학문적으로 알게 됐다. 그러던 중 이재하 옥천향토사연구회 전 회장으로부터 집필 의뢰를 받았다. 최대한 자료를 찾아 집필 의사를 전하고 응낙했다. 후손들과는 연락이 닿지 않아 육지수 교수의 저서를 검색했다. 추모문집 2권과 중등학교 교과서 2권의 저서를 바탕으로 경제학과 지리학 분야에 초점을 맞춰 쓰게 됐다. 경제 지리학자로서 드러내기 위해 육 교수의 추모문집 사진을 발췌해 싣게 됐다”고 집필 동기에 대해 언급했다. 이어 “옥천이 고향이지만 외지에 나가 살고 있는 출향인들은 고향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며 “옥천이 고향인 육지수 교수를 고향을 빛낸 인물로 삼아 옥천 지역민들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