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가 괴정 오상규 선생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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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가 괴정 오상규 선생 (7)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4.07.1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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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규 선생과 안중근 의사와 이준 열사 (2)

 『주한일본공사관 기록』과 『조선 통감부 문서 7권 271』의 「여순 감옥에서의 안중근 의사의 진술 내용」에 경성(서울) 방면의 관련한 인사에 대한 안중근 의사 진술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종호에 대해서는 들었지만, 만난 적은 없다. 유동열은 경성에서 학회 운동 때 보았지만 인사한 적은 없다. ▲이갑은 인사하지 않았다. 위 유동열과 마찬가지로 운동회에서 만났을 뿐이다. ▲안창호(安昌浩)도 이미 말한 대로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다. 그가 미국에서 돌아와 평양 연설 때 꽤 능숙하게 잘하기에 누구냐고 물으니, 안창호라고 하기에 알았다.

 ▲노백린(盧伯麟)은 알지만, 아직 인사한 적은 없다. 김달하는 인사한 적이 있어 알고 있다. 김명준은 알지만 근자에 의견을 교환한 적이 없다. 이세직의 이름은 알지만, 만난 적은 없다. /이용교는 모른다. 허곤은 몇 차례 만났다. 최재학은 인사만 한 사이이다. 김윤오는 알았지만, 인사하지 않았다. ▲오상규(吳相奎)는 본 적은 있지만, 인사한 적은 없다. 설태희는 이름은 알지만, 만난 적은 없다. 권동수, 변자현, 남상학, 김일봉은 모른다. 주석면은 본국에 있을 때 알았지만, 인사한 적은 없다. 홍석우, 박유예, 하윤홍은 안다. 강동(江東, 러시아)에서 경성으로 왔다고 들었지만, 모른다. 그들을 안 것은 본국에 있을 때였다. 이상설(李相卨)은 간도에 있다고 들었지만 내가 간도에 갔을 때에는 평화회의에 나가고 없었다.

○서북학회 애국계몽운동 안중근 의사께 자주독립과 애국정신 큰 영향 줘

 위와 같은 안중근 의사의 서북학회 회원에 대한 진술 내용에서 그 당시 서북학회를 주도하였던 오상규(吳相奎) 회장을 비롯한 이종호, 유동열, 이갑, 안창호(安昌鎬), 노백린, 김명준, 설태희 등 주요 지도자들과 직간접으로 불과분의 관계 뿐만 아니라, 서북학회의 애국계몽 평양 강연과 친목운동회 등을 통해 안중근 의사에게 자주독립의 애국정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안중근 의사는 1905년(광무 9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중국 상해에서 귀국하여 교육운동과 애국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을 하였고 1906년 3월 삼흥학교에 이어 천주교 계열의 돈의학교(敦義學校) 운영하였다. 또 1907년 국채보상운동 당시에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방 지부장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7년 8월 간도로 망명하여 이후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며 이등박문을 살해할 목적으로 비밀결사 조직인 ‘단지회’를 결성하였다. 마침내 안중근 의사는 1909년 만주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이며 1905년 을사늑약 후에 초대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저격하고 체포되어 1910년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준 열사와 오상규 선생

 이준(李儁) 열사와 오상규(吳相奎) 선생은 고향이 각각 함경도 북청과 회령이며 함경도 동향으로 두 분이 대한제국 시절 판사 관직에 있으며 서로 친분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국권회복과 민권신장을 위한 교육구국과 애국계몽운동으로 1906년 한북학회 창립 때 오상규(吳相奎), 이준(李寯), 이동휘(李東輝), 유진호 선생 등과 함께 주도적 인물로 오상규(吳相奎) 선생은 초대 회장으로 함께 함경도 곳곳을 다니면서 시군 지회, 지부 설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동지였다.

 한북학회의 주요활동은 교육구국운동과 계몽연설, 토론운동, 청년운동이었고 이 때문에 함경도에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고 구국을 위해 투쟁하는 국권회복운동가가 많이 배출되었다.

 이준(李儁) 열사는 1859년(철종 10년)~1907년까지 산 대한제국 시대의 애국계몽 운동가이자,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순국한 열사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이며 자는 순칠(舜七) 호는 일성(一醒)으로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아버지는 이병관이다.

 1887년(고종 24년) 북청에서 초시에 합격,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다.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으나, 이 해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하며 귀국한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만민공동회 가두연설 등을 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1902년 이상재, 민영환, 이상설 이동휘, 양기탁 등과 비밀결사인 개혁당 운동을 추진하였고 1904년 제1차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에 반대 시위운동을 주도적으로 하며 일본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송수만 등과 대한보안회를 조직해 총무를 맡고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보안회가 강제 해산되자.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 조직해 부회장을 맡아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저지시켰다. 일진회에 대항하여 공진회를 조직하여 투쟁하다 황해도 철도에 6개월 간 유배되었다. 1905년 5월 양한묵 등과 헌정연구회를 조직, 항일국민운동을 전개하며 이 해에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되었다.

○ 오상규 선생과 도산 안창호

 이준 열사가 헤이그 밀사로 장도에 오르기 전에 그동안 구국운동에 동참하였던 안창호, 이갑, 이종호 동지 등의 베풀어 준 전별연에 참석하여 마음의 준비를 더욱 다졌는데, 그때 동지들의 필적을 남겨 달라는 요청으로 우국충청의 시(詩) 몇 수를 지어 주었다. 이준 열사가 건네 준 시(詩)에는 ‘새해가 평안할 날이 없으니, 한 집안을 어찌 근심하리, 평생 우리들의 일은 독립과 자유를 구할 뿐“이라고 읋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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