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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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지
  • 박미련 작가
  • 승인 2024.07.1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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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대로 놓아둘 일이다. 다시 관계를 돌리려 하니 굽이굽이 가파른 길이다. 굴곡진 세월을 따로 보냈고 곡진한 순간을 홀로 견뎠기에 당연한가. 기대 심리는 여전한데 서로 너무 멀리 와 있다. 걸어온 길을 미루어 짐작해 보아도 그곳과 이곳의 차이는 선뜻 헤아려지지 않는다. 떨어져 지낸 물리적 시간이 자꾸만 심리적 거리까지 소원하게 한다. 결혼하면서 외국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친구다. 간간이 보긴했지만 서로의 일상은 짐작만 할 뿐 세월에 지배당한 감정의 조각들은 알 리가 없다. 

그러면서도 만날 때마다 가슴에는 쌓아둔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쏟아놓을 생각을 하면 만나기 훨씬 전부터 후련함을 느낀다. 번번이 기대가 실망이 되어 가슴에는 숭숭 바람이 들어도 다시 만날 때면 생각은 원점이다. 이번에도 한껏 부풀었다가 어김없이 속앓이했다. 옛날 생각에 불쑥 말을 꺼냈는데 주인을 잃은 말들이 허공을 떠돌았다. 그녀에게 가는 의욕이 의기소침해져서 낯선 이를 만난 거북 머리처럼 자꾸만 기어들었다. 그녀를 향해 시원스레 뻗었던 신작로가 거칠고 위험해져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졸아붙는다. 밤길에 허방다리를 건널 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좌고우면 고민이 깊어졌다. 우정도 김치처럼 묵을수록 깊은 맛을 낼 줄 알았는데 현실은 엉뚱하게 방향을 틀었다.

방치한 세월이 전혀 새로운 감정을 쌓기 시작했다. 예전의 그도 아니고 새로운 그도 아니어서 혼란스러운 재결합의 부부처럼 어정쩡한 관계가 이어졌다. 여러해 버려둔 김치처럼 곰팡이가 슬고 겉과 속이 하나로 뭉개지더니 가뭇하게 형체를 잃은 것 같아 안타까웠다. 사철 비바람에도 나 몰라라 한뎃잠을 재웠으니 선회한 선로는 당연한가. 보살핌 없이 애초에 그 시절에 닿기를 바랐던 것이 과욕인가. 친구라고 다 같은 친구가 아니다. 그와 나 사이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나였던 시절이 있었다. 긴박한 순간을 하나가 되어 버텼다. 현실도 함께 설계하고 미래도같은 꿈을 꾸었다. 나의 미래보다 나라의 앞일이 더 걱정되던 시절이었다. 백만학도인 우리에게 선한 부채 의식이 자리했다. 노블레스오블리주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본능적으로 학생으로서 해야할 일을 찾았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자신을 내어줄 준비를 차근차근해 나갔다. 순수한 열정은 온세상을 흔들었다. 각목과 최루탄에 서로의 미래가 무너져 내렸지만 굴하지 않고 나아갔다. 친구와 나는 동지애로 굳건했다. 친구라는 단순한 단어에 가둘 수 없는 가없는 사이가 되었다. 동지는 변할 수 있는 질감이 아니라 믿었다. 치열한 시절에 꿈도 현실도 나눠 먹던 사이였기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튼실한 뿌리를 내릴 줄 알았다. 덕분에 그 친구만 만나면 아둔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여 여태껏 그곳에 머물러 있는 어른아이가 된다. 세월을 무시한 오만이었다. 세월의 팔딱거림을 알 리가 없는 철없던 시절의 만용이었다. 엄연한 진실과 맞닥뜨리면서 여러 번 아픔을 겪었지만, 여전히 서늘한 진실을 인정할 수가없다. 설레며 만났다가 실망하고 돌아서기를 여러 차례, 나 또한 지나온 세월만큼 낯선 곳에서 낯선 얼굴로 살아왔는데 무얼 바라는가. 관계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서로를 비껴간 세월을 굳이 이어 붙이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자. 묵은지의 깊은 맛이 그리울 때 불쑥 찾아가도 좋은 그런 친구가 있음도가슴 벅찬 일 아닌가. 서로의 자식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의 표정을 살핀다. 그러나 푸념이 자랑처럼 보일까 봐 멈칫거려진다. 화제를 돌리거나 내 얘기에 집중하지 않는 것 같으면 혹시 나도 모르게 저지른 실수가 없는지 살피고 있다. 눈을 내리깔거나 눈동자가 흔들리면 가슴이 또 출렁 내려앉는다. 속으로 한숨 쉬고 있지 않을까 친구의 속내를 헤아리느라 그녀의 행동만 쫓는다. 친구와의 만남이 피곤한 일처럼 느껴진다. 어느새 옹졸함이 자리한다. 무위한 일에 정성을 쏟는 것같아 부아가 치민다. 점점 줄어드는 내 인생의 남은 날들을 헤아리기 시작하면서 다급한 마음이 더한다.
                   

( 다음호에 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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