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옥천군수(3) 이홍간(李弘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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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옥천군수(3) 이홍간(李弘幹)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4.09.0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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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내외직 두루 거친 문신  


이홍간(李弘幹) 군수는 조선 전기인 1524년(중종 19년)에 옥천군수로 부임하여 1527년(중종 22년)까지 3년간 옥천군수로 재임하였다. 그는 1486년(성종 17년)에 태어나서 1546년(명종 1년)까지 살았던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그는 관직에 나가서 내직으로 사간원정언, 홍문관교리, 세자시강원 등과 외직으로 수원군수, 곤양군수, 옥천군수와 공주목사, 청주목사, 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본관은 용인 이씨(龍仁李氏)이며 자는 대립(大立)이고 호는 쌍괴(雙槐)이다. 이승충(李升忠)의 증손자로 할아버지는 이봉손(李奉孫)이고 아버지는 사간 이효독(李孝篤)으로 어머니는 최명근(崔命根)의 딸이다.


1507년(중종 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3년(중종 8년) 식년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관직에 처음 진출하였다. 이후 예문관에 들어가서 1517년(중종 12년) 평안도 평사로 파견될 때까지 검열과 대교, 봉교를 지냈고 조광조(趙光祖)와 김정(金淨) 선생 등과 교유하면서 김정 선생 등의 편협하고 과격함을 경계하였다.


기묘사화 때 남곤 고변 나무람


중종 때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이홍간이 남곤(南袞)에게 고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나무랐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년) 음력 11월에 조선에서 중종의 적극적인 주도로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김전(金詮) 등과 함께 조광조(趙光祖), 김식 등 신진 사림의 핵심 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귀양보낸 사건이다. 조광조 등의 세력 확장과 위훈 삭제에 대한 불만이 원인 중 하나였다.


신진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정책 역시 그들을 지지하던 정광필, 안당 등의 반감을 사면서 지원받지 못하였다. 남곤, 심정, 김전, 홍경주, 고형산 등은 후궁과 궐내 세력을 이용하여 조광조 일파의 제거 여론을 조성하여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희생된 인물들은 후일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부른다.


이홍간 군수는 1520년(중종 15년) 2월 사간원정언이 되었고 홍문관교리를 거쳐 세자시강원사서, 호조, 예조, 병조 좌랑을 거쳐 정랑과 세자시강원 필선을 지냈고 수원군수와 곤양군수, 옥천군수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죄를 용모로 판단한 이홍간 추고하라


『중종실록』 1526년(중종 21년) 1월 8일자 기사에서 「양한필의 아내가 절사한 일에 대한 판단과 처결을 헌부에 지시하다.」 “사헌부 공사(公事)를 내리며 일렀다. 공주에 사는 양한필(梁漢弼)이 인장을 위조한 일로 죄를 입어, 그의 아내 고 씨가 종이 되었는데 아내 고 씨가 지아비를 위해 사절(死節)한 일을 풍문에 의해 행이(行移)하고서, 또한 목사와 판관이 즉시 신보(申報)하지 않은 것을 들어 추고하여 조율(照律)하자고 하고, 고 씨를 포장하는 절목을 예조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고자 한 공사이다.”


양한필의 아내가 죽은 지아비를 위해 절사(節死)한 일은 사간(事干) 및 노비들의 공술한 말이 한결같았으니, 사절한 것이 분명하기는 하다. 그러나 관찰사의 판단에는 또한 ‘나장 박계반이 공문을 가지고 잡으러 나갔을 때에 잡으러 간 것을 빙자하여 강제로 간음하고 침해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대저 양한필이 비록 사족이기는 하지만, 이 여인은 곧 죄인의 아내이므로 박계반이 침해하여 능멸하는 폐단이 없지 않았을 것인데, 이 여인이 또한 그날 밤에 목매어 죽었으니, 감사의 의견이 진실로 옳다. 그런데 차사원(差使員) 옥천 군수 이홍간(李弘幹)은 박계반을 심문해 보지도 않고 단지 용모만 보고서 회보하기를 ‘잔약하고 용렬하여 외람한 짓 할 기운이 없었으니, 강제로 간음하고 침해했을 리가 없다.’고 했다. 사람의 죄를 논할 적에 어찌 용모만 가지고 할 수 있겠는가? 이홍간을 추고(推考)하라." 기록하였다.


이후 이홍간 군수는 사옹원과 군기시, 종부시정(正과 공주ㆍ청주ㆍ광주목사를 지냈다. 1543년(중종 38년) 봉상시정(奉常寺正)를 거쳐 첨지중추원사에 올랐다. 다음해 12월 동지 부사로서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동지사 일을 마치고 귀국 길에 요동의 사류하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에 대해 『명종실록 5권』의 1547년(명종 2년) 1월 12일 기사에서 “북경에 갔던 사신이 잇달아 병으로 죽으니 매우 슬픈 일이다. 별도로 부의(賻儀)를 보내도록 하라.”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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